신약읽기 내비게이션 (어 성경이 읽어지네 실천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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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판] 어 성경이 읽어지네 - 인도자 지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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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증보판] 어 성경이 읽어지네 - 신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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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어 성경이 읽어지네 (구약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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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어 성경이 읽어지네 (신약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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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핵심을 꿰뚫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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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읽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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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 그리스도 중심 성경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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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성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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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를 건너 소망의 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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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뒷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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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죽음 부흥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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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는 도마복음 71–114의 해설서다. 1권(1–28), 2권(29–70)에 이은 3권(71–114)으로, 도마복음 로기온에 해석을 덧붙였다. 철저히 초월신의 관점, ‘좀비 신학’의 관점에서 읽는 방식을 거부한다. 우리 각자 안에서 성취되어야 할 ‘신성 언약’의 관점에서 텍스트를 바라보고 읽기를 시도하며 주석하였다. 그 점에서 한 치의 혼돈이 없다. 신을 말하되 ‘좀비 신학’의 초월신이 아니다. 왕국을 말하되 우주 종말론의 교리적 관점이 아니다. 도래하지 않은 가상 세계를 전제하는 것은, 자신도 모르는 것을 교리화해 사람들의 영혼을 혼미케 하고 현혹하는 자기기만이요 종교적 사기 행각이기에 동의할 수 없다.
도마복음은 이 점에서 매우 명쾌하고 간결하다. 로기온 114를 주석하는 동안 참고하되 의존하지 않은 도서는 Simon Gathercole의 “The Gospel of Thomas: Introduction and Commentary”다. 매 로기온마다 꼼꼼히 살폈고 자료적 도움은 받았으나, 주석은 의존하지 않았다. 연구자들에게는 매우 귀중한 도서라고 판단된다. 그 밖에도 April D. DeConick의 “The Original Gospel of Thomas in Translation”의 주석서도 참고했으나, 나의 성향과는 전혀 다른 관점이다. 그들을 의존할 수 없는 까닭은 도마복음조차 여전히 ‘좀비 신학’의 관점에서 주석하고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석을 읽어보면 그 점이 너무도 현격하다. 참고는 하였으나, 감사와 고마움이 있음에도 주석은 의존하지 않았다는 점을 서론에서 미리 밝힌다.
구약·신약 성서와 유대 신비주의 카발라, 그리고 현대 정신분석은 내게 도마복음을 읽어가는 틀 거리다. 애초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다. 순례의 길을 가는 동안 풀리지 않던 질문과 의문에 대한 힌트를 그곳에서 많이 얻었다. 카발라는 물론이고, 정신분석의 흐름은 내게서 재해석되었고 나름의 또 다른 기의를 담아 그들 속 기표를 사용하고 있다.
이 세 가지 중요한 요소는 어느새 나의 도마복음 읽기에 틀 거리로 녹아 있다. ‘융합’이라 해도 상관없다. 학문적 호기심에 의한 의도적 융합은 아니다.
성서에 대한 전통 해석에 만족할 수 없다는 데서 질문이 시작되었다. 도마복음 읽기도 성서에 대한 의문에서 비롯되었고, 성서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서 도마복음 글쓰기도 시작되었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면, 성서의 전통적 해석에 대한 이의제기에서 나의 글쓰기와 도마복음 읽기가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방법은 텍스트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그것밖에 찾지 못했다. 타인의 해석, 곧 칼뱅이나 루터, 그리고 수많은 개신교 주석가의 해석에 의존할 수 없었다. 부득불 헬라어·히브리어를 통한 텍스트와의 마주함이 40여 년이다. 또 부득불 헬라어와 매우 친화적인 콥트어를 더듬으며 도마복음 읽기에 도전한 것도 유사하다.
그 모든 것이 도마복음 읽기의 바탕이 된다. 도상에서 서양 사상사를 만나고 동양의 도덕경을 만나며 카발라와 현대 정신분석을 만난다. 그렇게 해서 도마복음 해설서 3권이 어느덧 마무리되었다.
처음 생명의 집은 어머니의 자궁이다. 때가 되면(시간) 자궁을 박차고 나와 생명줄인 탯줄이 잘린다. 이것이 최초의 어머니 부정이다. 잘린 탯줄은 다시 이어 붙일 수 없다. 어머니의 자궁과는 영원한 결별을 한다. 최초의 집을 떠나게 된다. 떠나야 다시 난다. 결별과 분리는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의 탄생이다. 독립된 개체로 태어난다. 독립된 개체는 자궁 속에서 열 달을 지나고서야 이뤄진다. 존재는 언제나 절기와 함께 찾아온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와 시간이 의미하는 바다. 존재와 시간에서 시간은 카이로스의 시간이요, 달리 말하면 ‘절기’다. 꽃의 계절엔 열매의 존재가 찾아오지 않는다. 열매의 시간(절기)에 열매의 존재가 찾아온다.
p. 16
칠성님께 정안수를 떠놓고 새벽마다 기도하는 향벽설위의 기도 형태는 늘 재산 분배 요구가 핵심이다. 그것은 정령숭배에서부터 인간의 심층에 자리 잡은 기본적인 의식 구조다. 가족의 건강과 객지에 나가 있는 아들의 성공, 우리 가족에게 더 많은 재산의 분배 요구가 신과 인간의 위치 설정이다. 정령숭배에서의 그것이, 신의 이름 유일신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바뀐 것이 아니다. 명찰을 바꿔 달고 신학 이론과 신의 얼굴을 새롭게 도금하였을 뿐, 신을 재산 분배자로 규정하는 것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p. 24
상상계와 상징계를 거치며 사회의 상징 시스템의 의미 사슬에 거미줄처럼 엉켜 상호 주체 놀이에 여념이 없는 동안 그것은 살림이 아니라, 죽임이고 죽음이다. 선과 악이고 아귀다툼이다. 죽음을 맛보는 삶으로 미래의 판타지를 꿈꾸며 자신을 기만하고 타인을 기만하고 그곳엔 집단 무의식과 규범과 언어의 상징 시스템이 주체가 되어 온통 사망과 살해의 법칙이 횡행한다. 주체의 자리에 대타자가 주인 역할을 하고 주체는 소외되어 있다.
p. 32
사람들은 우물 주변에만 맴돈다. 언제 우물이 동할 것인가. 우물이 동하면 누군가가 나를 우물에 넣어 줄 거야. 노예근성에 이미 점령되었다. 정오에 야곱의 우물에서 물을 긷던 여인이 있었다. 예수를 만난다. 예수는 이 여인에게 물 근원인 샘이 들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배(胚)에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그 순간 머리에 이고 있던 물동이를 내던진다. 야곱의 우물에 종속되어 있던 그녀가 노예의 자리를 벗어나 자유자가 되는 순간이다.
p. 36
존재의 부재로 인한 존재의 불안이 엄습할 때, 그들은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 대타자는 언제까지 나를 종으로 삼고 구속할 수 없다. 노예와 주인의 자리바꿈이 감행되는 때가 곧 존재의 불안이 엄습해서 병을 앓게 될 때다. 로마서 7장의 바울의 신병(神病)이 찾아올 때, 주인과 노예의 자리바꿈을 향한 증세가 찾아옴이다. 상징계의 질서에 좌절하고 내가 나를 만나지 못한 소외로 인해 발생하는 히스테리 증세가 찾아올 때가 곧 뒤집기 시간이다. 라캉이 말하는 상징계의 전복을 통해 실재계가 찾아오는 증세요. 문 앞에 서 있는 많은 사람의 타자 주체에서, 존재의 나, 실재의 내가 주체를 회복하는 시간이다. 독립과 광복의 시간이다. 여기서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비유가 선명하게 해석된다.
p. 44
솔로몬의 잠언은 지식을 찬양한다. 솔로몬의 전도서는 지식의 한계를 명확히 한다. 지혜와 지식의 밖에 서서 안을 바라보는 것이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분석가 담화라 하겠다. 아무런 앞선 지식이 작용하지 않아야 선입관 없이 내담자를 바라볼 수 있다. 만일 앞선 지식을 바탕으로 내담자를 바라보게 되면 온전히 분석할 수 없다. 자신의 앞선 지식을 토대로 내담자를 분석하게 되면 판단과 심판을 하고, 자신의 기표를 중심으로 주인 담화를 펼치게 된다. 분석가 담화가 아니라 주인 담화에 빠지게 되면 폭력으로 흐르게 된다.
p. 68~69
하나님의 형상 안에 빛이 있다. 가이사의 빛에 의해 하나님의 형상이 은폐된다. 하나님의 빛은 하나님의 형상 안에 숨어 있다. 하나님의 형상은 안에 있다. 저 하늘에 있는 것도, 저 만물 속에 있는 것도 아니다. 오직 네 안에 있다. 그런데 안에는 다른 것이 진을 치고 있고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과 빛은 그 다른 것(대타자의 빛)에 의해 은폐되어 있다. 빛에 빛이 없고 주체에 주체가 없다.
p. 83
노예 사이의 서열을 위해 주인(상징계의 대타자, 사회의 시스템)에게 인정받으려는 치열한 전쟁을 치른다. 계급의 수직 상승을 위해 그 사회가 승인하는 인정서를 받아 들고(진급이나 각종 라이선스), 인정투쟁에 승리라도 한 듯 잠시 미소 짓는다. 그는 여전히 대타자의 노예다. 인정서를 받아 들었다는 뜻은 상위의 서열에 참여한다는 의미이지, 인정투쟁의 끝에 도달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조금 다른 출발선에 서 있을 뿐, 다시 시작된다. 인정투쟁의 전쟁터에 하루도 쉴 날이 없다. 그 사회는 그렇게 구조화되었고, 그렇게 돌아간다. 상징계의 구성원으로 사는 동안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몸이다.
p. 102
대타자가 그대의 안을 점령하고 그대를 만들었다면 대타자의 상징계, 타자 자아를 그대 자신으로 알 것이고, 만일 대타자의 상징계를 전복시키는 진정 혁명이 그대 안에서 이뤄지면 그대 안에 있는 어둠을 보게 될 것이다. 어둠을 보게 되면 그 어둠이, 타자 자아가 ‘존재 자아’를 덮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타자 자아가 베일이고 덮개였으며 봉인의 재료요 인침이고 동시에 입막음(φράσσω)이다. 이 말씀의 해석을 발견하려면 따라서 봉인이 해제되어야 한다. 안에 있는 어둠이 걷히지 않으면 밝게 볼 수 없다.
p. 113
상징계에서의 ‘인정 놀이는’ 언제나 상호 ‘품앗이’다. 칭찬도 품앗이다. 내가 칭찬을 베풀었으면 언젠가 칭찬으로 돌려받아야 한다. 칭찬이 비난으로 돌아오면 더 큰 비난으로 앙갚음한다. ‘누군가를 위해서 살지 말자.’ 거기 ‘누군가’는 상징계에 속한 모든 그물망이다. 남편을 위해서, 자식을 위해서, 아내를 위해서, 친구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누군가를 위해서’ 사는 것은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인정욕구’의 표출이다. 인정욕구는 결핍이다. 인정투쟁은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부터 시작된다.
p. 118
아비와 아들이, 어미와 딸이, 시어미와 며느리의 분쟁이 그대 안에 폭풍처럼 시작되었다면 ‘때’가 찾아온 것이다. 비로소 제대로 ‘정신분석’이 시작될 수 있다. 무의식에 좌정하고 있는 심원(心源)의 정체를 드러낼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주인과 노예의 ‘포지셔닝’이 어디서 잘못되었는지 소상하게 드러날 때가 도래한 것이다.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는 ‘하늘의 징조’가 그대 안에서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존재의 나’를 향한 여행이 한순간도 멈춰 있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시간이 찾아오고 있다는 것 아닌가. ‘시대’로 번역하고 있지만 오해의 소지가 있다. 차라리 ‘절기’나 ‘계절’로 번역하면 오해를 줄일 수 있다. 우리말로 하면 ‘철’이다. 철(ⲕⲁⲓⲣⲟⲥ, 카이로스)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란, 따라서 ‘자신의 존재 여행’에 ‘눈 뜸’의 시작이다.
p. 125
“찾으라”는 말은 질문을 금하는 것이 아니다. ‘질문하라’는 말과 같다. 그러나 ‘찾으라’는 말이 함의하고 있는 것은 ‘질문’하되 타인의 즉답에 기대지 말고 ‘자신의 탐구’로 이어가라는 의미가 더 강하다. 즉, “나에게 곧장 답을 요구하기보다, 네가 너 스스로에게 직접 찾아가라”라는 권고가 화자예수의 태도에 깊이 담겨 있다. 질문은 ‘찾기의 시작’이지만, 찾기는 ‘자기 참여와 성찰’을 전제한다. 질의와 응답에 임하는 화자와 청자가 갖춰야 할 기본적인 태도요 자세다.
p. 127
인간의 내면은 처음에 ‘타자의 누룩’으로 반죽이 되어 있다. 권력의 말, 종교의 말, 합리의 말이 내 반죽을 이미 팽창시켰다. 그 빵은 먹을 수 있으나 ‘생명’을 공급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내면에 ‘비가시적 생명의 종균’이 들어온다. 그것은 외부 교사나 권위와 무관하게, ‘번개 같은 통찰’로 ‘돌비’를 깨뜨린다. 그때부터 ‘케테르–호크마–비나’의 발효가 이뤄진다. ‘넉넉한 이해’비나가 반죽 전체를 살린다. 이 과정은 서서히, 자연스럽게, 때로는 내가 인지하지 못한 채 진행된다. 항아리의 밀가루가 어느 순간 ‘비어’ 있듯, 과거를 채우던 ‘욕망과 환상’은 빠져나가고, 마침내 ‘큰 빵’, 나와 타인을 살릴 ‘양식’이 된다. 그때 나는 더 이상 ‘타자의 목소리’를 재생산하지 않는다. ‘내 안의 로고스’가 말하고, 나는 ‘나의 존재’로서 말한다. 이것이 “들을 귀 있는 자”가 듣는 내용이며, 하나님 나라가 내 안에서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표지다.
p. 153~154
여인이라는 형상은 단지 특정한 성별 정체성의 지칭이 아니라, 신적 임재가 머무는 그릇, 곧 ‘쉐키나’(שכינה 신적 임재의 장막, Tabernacle)의 표상으로 기능한다. 전통적 상징 체계에서 쉐키나는 여성적 이미지로 묘사되곤 한다. 신적 여성성이다. 그 의미에서 여인은 성별(sex)을 지시하기보다, 신성이 깃드는 장(場), 수용과 잉태, 탄생의 가능성, 그리고 변화의 매개를 은유한다. 따라서 도마복음 후반의 “여자가 남자가 된다.”는 명제 역시 생물학적 전환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성(性) 이분법을 넘어 신성의 충만과 균형의 회복—즉 내적 통합—으로 읽어야 한다. 인간 내면에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공존하며, 신성은 그 둘의 균형과 상호 침투 속에서 현현한다는 영성의 고전적 통찰과도 맞닿는다.
p. 156
“깨진 항아리를 등에 진 여인”의 비유는 아버지의 나라가 채움의 완성으로 열리지 않고 비움의 성숙으로 열린다는 영성의 핵심을 압축한다. 단지의 손잡이가 깨어진 사건은 실패가 아니라 은총이며, 흘려보낸 밀가루는 손실이 아니라 해방이다. 집에 도착했을 때 마주하는 공허는 절망이 아니라 시작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알게 된다. 아무것도 아닌 자리에 모든 것이 깃든다는 것을. 그리고 그 깨달음 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겸손을 수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겸손해진다. 더 이상 온유를 목표로 삼지 않고, 스스로 온유해진다. 더 이상 인정받기 위해 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머무는 법을 배운다.
p. 160
예수는 지성소의 빛과 하나 된 자리에서 말하며, 그 빛의 자리에서 가족을 부른다. 그러니 문밖에서 외치는 목소리, 사랑의 명분을 두른 요구, 세상의 임금이 부여한 권세의 언어가 아무리 크다 해도, 그 언어가 문 안의 빛을 대체할 수는 없다. 오히려 십자가 사건과 더불어 “세상 임금이 밖으로 내던져지는” 순간, 처음 집의 주권은 무너지고, 속사람의 집이 세워진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는 붕괴를 거쳐, 새로운 거처가 열린다.
p. 173
초월 신과 세속 권력 의지(가이사의 형상)를 기반으로 내달리는 모든 종교 현상은 언제나 파괴적이고 폭력을 수반한다. 천박한 신학과 신인식, 배타성과 선민의식의 특권이 그들 정신의 동력이다. 선민의식은 천민 의식이요, 배타성은 자기 존재의 부재와 결핍만을 역으로 드러낼 뿐이다. 신을 우상으로 세워 놓고 하나님이 자기 편이란다. 일어서서 봉기하자고 선동한다. 전 세계 젊은이들의 의식에 파고드는 극우적 바이러스 현상은 존재의 불안과 ‘소외’의 곰팡이가 순식간에 번지고 있다는 반증이다. 바벨의 문명엔 치유 인자가 없고, 인문 정신 부재의 그늘에서 피어나는 곰팡이라는 것을 집단 지성이 속히 알아차려야 길을 찾을 수 있다. 양극단은 타도와 배제의 방식으로 치유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인문의 빛이 환히 비춰야 악성 곰팡이 서식을 줄여 갈 수 있다.
p. 178
여기서 ‘바리새인’은 특정 역사적 집단을 넘어, 종교 제도나 관념의 수호자라는 유형으로 확장해 읽을 수 있다. 그들은 규범과 교리를 통해 사람들을 길들이고, 그 틀 안에서만 구원과 행복이 가능하다고 설득한다. 말하자면 상징계의 언어, 곧 선악의 지식으로 세계를 재단하고, 그 지식의 열쇠를 자신들이 쥐고 있다고 선언한다. 이 지식은 나름의 질서와 안정감을 준다. 그러나 예수가 문제 삼는 지점은 바로 그 안정감이 실제의 생명, 곧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만남으로 나아가는 길을 막을 때다.
p. 197
‘문밖/문 안’의 역전 비유도 같은 축에 놓인다. 어떤 이들에게 ‘자기 집 안’이라고 여겨지는 자리(상상계·상징계의 질서)가 사실은 문밖일 수 있다. 가려진 휘장 바깥에서 안이라 착각하는 것이다. ‘두드림’은 밖에서 안으로만 향하는 단순한 도식이 아니다. 서 있는 자리의 전도 때문에, 안팎이 바뀐다. 줄탁동시의 이미지처럼, 안과 밖에서 동시에 깨뜨려야 한다. 껍질이 여러 겹 벗겨지듯, 의식의 층위가 하나하나 열리며 진짜 ‘안’으로 나아간다. 이 여정 역시 깨어 있음의 다른 표현이다.
p. 209
우리의 과제는 단순히 금식의 횟수나 방식이 아니다. 무엇을 양식으로 삼아 살아왔는지를 성찰하고, 그것이 더는 생명을 주지 못한다면 담담히 내려놓는 용기다. 혼인 잔치의 달콤함에 머물고자 하는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신랑이 떠나는 상실을 두려움이나 배신으로만 해석하지 않는 통찰이다. 떠남은 유익할 수 있다. 그것이 우리를 더 깊은 자리로 이끄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옛것을 애지중지 붙들고 있으면 새 포도주는 쏟아지고 옷은 더 찢어진다. 반대로 떠나보낼 줄 알면 새 부대는 새 포도주를 온전히 담아낸다.
p. 209
우리는 자신을 동정하거나 과장되게 죄책감에 빠질 필요가 없다. 분열의 기원을 알아차렸다면 이제는 방향을 돌리면 된다. 첫 번째 부모를 떠나 두 번째 부모에게로, 허구의 권위를 내려놓고 내면에서 익어가는 뜻으로. 그렇게 길을 돌이킬 때 우리는 더는 타인의 시선이나 전통의 관성에 휘둘리지 않고, 조용하지만 단단한 자유의 자리로 나아간다.
p. 222
종교는 이를 수행법으로 도구화한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 묵언 정진 수행에는 침묵의 모방만 있을 뿐 묵언이 없다. 묵언 정진 수행으로 ‘묵언’을 대체할 수 없다. 그저 그렇게라도 해 볼 뿐이다. 이러한 묵언의 길을 지나면 드디어 둘이 하나가 된다. 높아진 것과 깊어진 것, 일과 이가 하나가 된다. 고독과 침묵, 홀로임을 지나 ‘싱글 원’으로 나아간다. 쌍둥이로 남지 않고 온전한 하나가 된다. 이스마엘과 이삭, 야곱과 에서의 반목을 지나 약복강의 화해처럼, 자유와 사랑이 하나가 된다. 산을 옮겨 바다를 메우듯, 마침내 이원성이 극복되고 하나가 된다. 이 과정을 통과한 이를 성서는 ‘사람의 아들’이라 부른다. 둘을 하나로 만들면 비로소 ‘사람의 아들’이 된다. 곧 신적인 말, 신언(神言)이 시작되고 신언은 신언(信言)이 된다. 로고스의 말, 믿을 만한 말이 입에서 흘러나온다.
p. 227~228
발견이 거래의 논리로 흡수되면, 보화는 곧 이자와 채무, 유·불리를 가르는 삭막한 장부의 언어로 변질된다. 신흥종교시장이 즐비하게 형성된다. 영혼의 양식이 시장의 통화로 바뀌는 순간이다. 그러면 깨달음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된다. 더 많이 빌리고, 더 높은 이자를 주며, 더 긴 줄을 세우는 것에 관심이 쏠린다. 진리가 상품이 되면, 신념은 구호가 되고 공동체는 시장이 된다. 결국 그곳에는 자유가 아니라 또 다른 예속과 종속이 기다린다. 지배와 피지배의 종교 질서가 형성되고 권력의지의 시장이 열린다.
p. 244
“하늘들과 땅이 너희 눈앞에서 두루마리처럼 말려 사라질 것이다.” 이 말은 우주의 물리적 종말을 예고하는 크로노스 시간표가 아니라, 나를 지배하던 가치 체계와 세계관, 곧 바벨론의 하늘과 땅이 접히는 카이로스의 순간을 묘사한다. 그 하늘과 땅이 사라져야 고토로 돌아갈 길이 열린다. 신바빌로니아가 역사 속에서 바람처럼 지나간 것처럼, 내 안의 바벨론—지배와 비교, 우월감과 소유의 신전—도 두루마리처럼 말려 사라진다. 그 자리에 무엇이 남는가. “살아 계신 분에게서 생명을 끌어내는” 현재형의 삶이 남는다.
p. 267~268
여자가 남자 되는 얘기는 도마복음의 가장 논쟁적 로기온이고 신비적 비의秘義다. 생물학적 여성을 남성으로 만든다는 얘기일까? 요한복음 16장은 생물학적 남성인 제자들을 해산하는 여인으로 비유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정신적으로는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얘기이니, 씨알을 내기보다는 씨알을 잉태하는 여성이라는 거다. 씨알의 잉태는 마음의 자궁에서 듣는 것을 통해 이뤄진다. 그것은 생물학적 남녀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아들’을 낳게 되면, 비로소 ‘사람의 아들’ 씨알의 사람 남자가 된다는 얘기다. 씨알로고스의 불꽃을 내는 이가 있는가 하면, 짐승의 씨를 뿌려 대며 남자인 척하는 종교인들이 다수다. 들어야 할 여자라는 걸 잊고 있는 것이다.
p. 275~276
성막(מִשְׁכָּן)은 tabernacle이요, σκηνή 하나님의 신이 머무는 쉐키나(שכינה)다. 여성이다. 성막의 휘장이 찢기며 성소와 지성소가 하나가 되면 싱글 원이 된다. 여자는 비로소 남자가 되고 하나님의 신이 지성소의 은밀함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씨알의 남자로 되살아난다. 여자가 남자가 되는 장엄한 서사가 완성된다. 하나님 나라는 역동적으로 메르카바의 전차처럼 웅비하며 역동한다. 여자가 남자가 되면서 독수리의 날개가 하늘로 날갯짓하게 된다. 정신은 이렇게 영글어 간다. ‘여성성 → 남성성 → 살아 있는 영’이 된다.
p. 281
‘도마’가 쌍둥이란 의미를 갖고 있듯이, 성서와 도마복음도 쌍둥이로 이해될 수는 없을까? 마치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이 서로 직접 연관이 없지만, 그 둘이 성서의 시작과 끝을 이루면서 한 쌍둥이가 되었듯이 말이다. 히브리어와 콥트어를 비롯한 해박한 성서언어 연구자인 저자는 이 책에서 그런 상상력을 갖고 도마복음을 멋지게 해설해 주고 있다. 도마복음의 깊은 깨달음의 세계에 관심을 가진 분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일독을 권한다.
손원영|서울기독대학교 교수, 도마복음연구회 회장
기존의 도마복음 연구는 동양 철학이나 다른 종교 전통의 관점에서 이루어졌다. 반면 저자는 기독교 정경 복음서와 유대 신비주의 관점에서 도마복음에 접근한다. 이 책은 정경 복음서와 유대 신비주의 틀로 파헤친 본격적인 도마복음 연구서다.
移例 가천노 박사|종교개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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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품 구성 | 전집 또는 세트일 경우 낱권 구성, CD 등(기본값:해당사항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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