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죽음과 좀비 신학 (창세기 1장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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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호

예랑

2025년 11월 10일 출간

ISBN 9788988137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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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장 읽기의 기존 전통은 어거스틴과 토마스아퀴나스의 신학 토대 위의 가톨릭은 물론이요, 개신교의 초조인 루터의 이신칭의론 및 칼뱅의 기독교강요의 신학 체계가 창세기 1장 읽기의 상징질서 저변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신학적 기표와 기의의 연쇄 사슬의 바탕에서 창세기 읽기를 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종교 시스템의 연쇄 사슬을 이루고 있는 기존 언어의 틈새가 수없이 보입니다. 본서는 전통의 상징 체계의 사슬을 이루고 있는 개념들, 기존의 전통적 해석 체계에서의 일탈과 해체를 시도합니다. 왜냐하면 우상의 신학 아래서 형성된 해석 체계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비록 창세기 1장 읽기이지만 기존의 성서 읽기 방식에 대한 전면 재검토 요청을 담고 있습니다. 궤변과 터무니없는 몽상의 창세기 읽기로 치부되겠지만, 어느 시대나 기존 체계에 대한 강력한 이의 제기는 있게 마련입니다. 벌거숭이 임금님의 우화에 나오는 어린아이처럼 허위의 해석 체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리스 신화를 팩트로 읽는 독자가 있던가요?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창세기 1장은 신화적 이야기로 읽는 것이 타당한가. 벌거숭이 임금님 주변의 간신들은 펄쩍 뛸 것입니다. 이야기 관점에서 다시 읽어보면, 무궁무진합니다. 영감의 보물 창고입니다. 해석의 다양성은 혼란의 부추김이 아니라 생명의 풍성함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다양한 프리즘을 통해 다양한 색깔이 드러나게 하려면 전통적 해석의 감옥에서 풀어 놓아야 합니다. 창세기 1장은 영감의 원형적 보고寶庫입니다. 


법정의 판사 앞에서 천동설이 맞다고 증언하고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했던 갈릴레오의 유명한 일화! 성서무오설과 유기적 영감설로 중무장한 근본주의 법정에 서게 되면, 창조 설화, 신화적 이야기는 목 베임 당할 것입니다. 그래도 이야기가 이야기이지 뭐란 말인가요. 이야기를 팩트로 믿어야 한다는 저 무지막지한 근본주의 폭력에 인류가 얼마나 시달렸는지를 생각하면 오금이 저립니다. 


본 창세기 1장 읽기는 기존의 글쓰기 방식을 벗어나 강론 화법으로 서술하였습니다. 본서의 내용은 수년 전 영상으로 제작된 바 있습니다. 녹취 후 교열 교정 형태로 다시 정돈하였습니다. 유튜브에 업로드된 동영상을 참고하면 의도하는 바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 읽기는 성서의 첫 단추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단추입니다. 창세기가 성서 이야기의 알파라면 요한계시록은 오메가인 셈입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마지막 단추도 엇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장 읽기가 요한계시록 읽기의 성격을 결정짓습니다. 중간에 나오는 이야기를 읽는 방식을 규정하는 것도 매한가지입니다.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어떻게 읽느냐”는 물음은 예수가 어느 율법사에게 던진 질문입니다. 먼저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본문 비평의 영역입니다. 반면에 어떻게 읽느냐는 해석 영역입니다. 키다חִידָה 와 마샬מָשָׁ֣ל! 키다는 감춘 것이고 마샬은 비유라는 뜻입니다. 비유는 감춘 것을 드러내는 방식이라고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시편 78편 참조 


어떻게 읽느냐는 감춘 것, 은폐된 것을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여전히 언어로 표현되기 때문에 그 또한 비유를 동원하게 마련입니다. 은폐된 것을 드러내는 비유가 발화시에는 서로 자명하게 소통됩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자명한 진리는 더 이상 자명하지 않고 비유 자체가 수수께끼가 되고 더 깊이 은장隱葬됩니다. 칠일 창조 서사의 이야기로 감춘 것을 드러내려는 자명한 이치는 숨어버리고 “천지창조공사” 창업주의 홍보 책자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서사를 우주 만물 창조로 읽고 역사적 팩트로 읽으면 요한계시록은 자연스럽게 우주의 소멸과 우주 종말론으로 읽게 됩니다. 거기에는 위대한 우주의 창업자인 전지전능한 초월 신을 전제하게 됩니다. 예수는 이를 전복시킵니다. 그렇게 있는 초월 신은 거짓이고 미움이고 사람의 영혼을 살해하는 살인의 신이라고 유대교의 신을 탄핵하고 해체해 버립니다.요 8장 참조 작금의 기독교는 예수를 전면에 내세우고, 예수 그리스도를 종주宗主로 세우고 있지만, 예수의 가르침보다는 유대교의 전통을 좇고 있습니다. 첫 단추인 창세기 1장 읽기에서 판가름 되고 있습니다. 


본서는 전통적인 창세기 1장 읽기의 도그마를 해체합니다. 창세기 1장은 성서의 다른 이야기들의 제1 원형입니다. 아르 키 타입archetype입니다. 본서는 반복하여 제1 원형인 것을 드러낼 것입니다. 에덴 이야기는 제2 원형입니다. 모든 이야기는 이 두 이야기에 수렴되고 변주變奏 됩니다. 창조 서사를 해설하면서 때로는 논리적 서술보다는 문학적 상징의 비약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장점이자 단점으로 보일 수 있을 것이고 근본주의 시각에서는 매우 불편한 지점이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본서를 출간합니다. 이 같은 독법이 과연 가능한가. 성서를 이렇게 읽어도 될 것인가. 대답은 독자 각각의 몫이 될 것이고, 어떤 비판도 달게 받을 것입니다. 창세기 1장 이야기에 이어 ‘야훼와 하야 그리고 아바’, ‘신 죽음과 좀비 신학’, ‘메타노에오와 회개의 본래 의미’의 주제 글을 덧붙였습니다. 창세기 1장 읽기는 신 죽음과 새로 복권된 신의 관점으로 다시 읽어야 한다는 뜻에서 이 책의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목차


들어가는 말 


하늘과 땅의 창조

성서가 말하는 땅 

바람이 분다 

2절의 중요 개념들

빛이 있으라 - 첫째 날 

윗물과 아랫물 - 둘째 날 

뭍이 드러나는 이야기 - 셋째 날

위를 비추는 마음의 하늘 - 넷째 날

빛אוֹר, φῶς과 바람רוּחַ,πνεῦμα의 서사 - 다섯째 날

말문 - 여섯째 날 1

형상과 모양 그리고 ‘씨 알’의 양식 - 여섯째 날 2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안식 - 일곱째 날

야훼יְהוָ֤ה와 하야הָיָה, 그리고 아바אָוָה

신 죽음과 좀비 신학

메타노에오와 회개의 본래 의미



본문 펼쳐 보기


창세기 1장의 창조 서사를 비롯하여 에덴, 노아, 아브라함, 모세의 출애굽 이야기, 사사들의 이야기, 가나안 땅 이야기, 바벨론과 귀환 이야기, 그리고 사복음서와 사도행전,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바울 서신을 비롯한 일부 서신서를 제외한 모든 부분이 ‘이야기’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야기들이 모여 집대성된 서적입니다. 이야기의 형태를 지니지 않은 것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성서는 서사적 구조를 깊이 내재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이야기가 존재하며, 이야기가 없는 사회는 없습니다.

p. 16



창세기 칠일 창조 이야기가 성서 모든 이야기의 ‘제1 원형’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창세기 1장 이야기의 구조는 요한계시록까지를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영’, ‘일곱인’을 떼는 이야기 등이 모두 창세기 1장의 원형적 구조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 원형적 이야기가 우리 삶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변주變奏’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야기 속에도, 출애굽과 모세 이야기 속에도 창세기 1장의 이야기 구조가 다양한 언어와 진술 방식, 서사적 구조 속에서 원형적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p. 27



요컨대 ‘에레츠’라는 단어 하나에 단일한 정의를 고정시키는 것은 성서적 맥락을 손상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성서는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에레츠’의 의미를 층위적으로 드러냅니다. 창세기의 원형 서사, 에덴의 개념 분화, 모세의 역사, 그리고 예수의 비유에 비추어 보면, ‘에레츠’는 동일한 명칭 아래 다른 상태와 기능을 담는 그릇이며, 언약의 귀환과 결실이 일어나는 ‘가장 적합한 땅’으로 수렴한다고 하겠습니다. 천지를 ‘바라’했다는 것을 광활한 우주를 창조했다는 기존의 전통적 해석을 내려놓고 성서의 전체 맥락에서 보면 땅의 창조가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조망해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을 놓고 창조론과 진화론의 프레임에 갇혀 논쟁하는 동안, 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땅의 창조에 대해 놓치게 됩니다.

p. 38~39



‘영’처럼 어려운 말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왜 이를 ‘성령’이라 부르는지 이해하셔야 합니다. ‘거룩한 영’이라 하는 까닭은, 이전엔 더러운 영, 곧 이기심과 욕망의 바람에 휘둘렸기 때문입니다. 사방에서 바람이 붑니다. 네 바람이 붑니다. 우리는 그 바람에 휘말려 농락당했다는 걸 한참 지나 알지요. 그 바람이 모두 끝나야 합니다. 창세기 1장 2절, 토후·보후·호쉐크는 그 바람이 끝나는 지점입니다. 보십시오. 네 바람과 하나님의 루아흐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루아흐는 외부에서 몰아치는 바람이 아닙니다. 네 바람은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 공중 권세의 바람입니다. 풍요의 바람(애굽 고센 땅의 바람), 권력의 바람, 명예의 바람, 무섭고 두려운 짐승의 바람(권력과 재물의 결합)—그 바람에 안 빠진 인생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루아흐 엘로힘은 그 바람과 다릅니다.

p. 47



‘토후’는 보통 ‘혼돈’으로 옮기되, 사전적 의미로는 ‘황폐함, 가치 없음’을 내포합니다. 이사야 40장 15–17절은 열방과 섬, 레바논의 삼림과 짐승들까지도 야훼 앞에서 ‘아무것도 아님(아인)’으로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영어로는 “less than nothing”으로 번역되는데, ‘없는 것처럼 여김’이라는 뉘앙스입니다. 현대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역작으로 알려진 “less than nothing”이 여기서 가져온 책명입니다. 슬라보예 지젝의 “Less than Nothing”은 헤겔의 철학 유산을 현대 사회에 적용한 독특한 개념입니다.

p. 54



결국 ‘창세부터 감추인 것’을 드러내는 창조 사건은, 우주의 물질적 기원을 설명하는 데 있지 않고, 내 안의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이 내 마음κόσμος에 씨를 뿌려 빛을 내고, 그 빛이 자라고 열매를 맺는 생명의 사건에 있습니다. 이것이 곧 구원이요, ‘내가 나 되는’ 존재의 회복입니다. 말씀과 내가 하나 되는 사건, 곧 진리의 사건입니다. 이것이 창세기 1장 3절 “빛이 있으라”의 깊은 뜻입니다.

p. 66



창세기 1장은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이야기로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분이 창세기 1장을 이야기로 보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이야기로 읽지 않고 역사적 사실로 팩트 체크하듯 읽고 있습니다. 단군 신화의 곰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읽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유독 창세기 1장은 역사적 사실로 믿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은 불경 중 불경이어서 입에 올리기조차 두려워합니다.

p. 68



셋째 날의 비밀은 분명합니다. 내 배에서 흐르는 생수의 강이 마음의 바다를 고요하게 하고, 그 고요 위로 마음의 땅이 드러나며, 그 땅에서 생명의 씨알이 자라난다는 것입니다. 광야의 만나에만 머물지 않고, 가나안의 양식으로 옮겨가듯, 바깥에서 들은 말만 되뇌지 않고 내 마음 밭에서 길러진 언어로 살아갑니다. 그때 비로소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이 추상이 아니라 현재형이 됩니다. 오늘 우리의 여정도 그 장면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p. 85



마음이 동할 때, 우물물에 천사가 내려오는 것처럼, 자연의 원리가 마음의 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 안의 해와 달과 별, 즉 소망들은 이기적인 소망이 아니라, 인생의 길을 잃었을 때 나침반이 되어주는 존재들입니다. 밤하늘의 별을 보며 길을 찾아 앞으로 나아가듯, 우리 마음의 세계에도 방향을 잡을 수 있는 ‘일곱 별’이 있습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에클레시아 즉, 마음의 성전 안에 있는 일곱 등대와 촛대들은 바로 밤하늘의 별들을 상징합니다.

p. 92



다스림의 현장이 바깥 자연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세계에 해당한다는 통찰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무의식의 깊은 바다, 사유의 하늘, 본능과 감정이라는 다양한 ‘생물들’이 살아 움직입니다. 때로는 통제할 수 없는 분노, 두려움, 슬픔, 과도한 지식의 교만 등, 우리를 사로잡는 힘들이 꿈틀거립니다. 본문을 내면의 비유로 읽을 때, 다스림은 자기 세계의 질서를 세우고, 파괴적 충동을 길들이며, 유익한 자원을 적절히 불러와 생명을 살리는 방향으로 활용하는 역량을 가리킨다는 독법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주목해서 읽어야 할 대목은 바로 이러한 관점입니다.

p. 119



창조 동사들의 결, 곧 ‘바라(בָּרָא)–야차르(יָצַר)–아사(עָשָׂה)’의 진행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이 세 동사는 각각 창조의 다른 층위를 암시합니다. 바라가 근원적 ‘불러냄/낳음’이라면, 야차르는 ‘형성/조성’, 아사는 ‘만듦/운용/실행’의 결을 가집니다. 본문은 이 단계를 엮어, 창조가 단번의 사건이 아니라 점층적 과정임을 보여 줍니다.

p. 129



성경 곳곳에서 ‘땅’은 마음의 비유로 작동합니다. 가나안, 광야, 바빌론, 고토의 회복 등은 모두 바깥 공간의 서술인 동시에 마음의 상태를 가리키는 상징적 언어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며, 생물을 다스리라”는 말씀은 내 마음의 땅, 황폐하고 굳어 있는 그 내면을 생명으로 가득 채우고 질서 있게 다스리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야 경전이고, 그래야 성서입니다.

p. 143



“인자는 안식의 주인”이라는 말씀을 마음 성전의 관점으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전의 주인은 바깥 어딘가의 절대 타자가 아니라, 거룩의 상태에 들어선 나 자신의 내면 중심, 곧 통합된 자아입니다. 아브라함이 백세에 이르러 비로소 삶의 주체로 서듯, 우리 역시 내 안의 성소와 지성소가 하나가 되는 통합의 경지에서 내 삶의 주인으로 깨어납니다. 이때는 바깥에서 어떤 바람이 불어도, 내면은 함께 휩쓸리지 않습니다. 타인의 오해와 비방이 들려도, 그것을 그 사람의 문제로 식별하고, 내 속에서 불필요한 전쟁을 더 이상 일으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안식의 주권, 내면의 홀리 스피릿이 이미 내 안에 좌정했기 때문입니다.

p. 147



칸트의 인식론 전환, 그리고 예수의 내면 전환과 같은 무늬를 지닙니다. 방향이 ‘밖’에서 ‘안’으로, ‘사물’에서 ‘주체’로 돌려지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는 하이데거도 현존재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창세기의 창조 서사도 우주 창조의 시선에서 현존재의 존재 이해로 옮겨 읽어야 합니다. 그리스 신화나, 로마 신화도 신의 이름을 빌려 인간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듯, 창조 서사도 우주 창조의 이야기로 인간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모든 판타지 소설, 시나 각종 예술 작품은 결국 인간의 이야기입니다. 놀랍게도 이 땅에서는 동학에서 천지개벽의 시선 전환이 이뤄집니다. 시천주(侍天主)의 동학(東學)에서 코페르니쿠스의 대전환과 같은 문양의 사상이 최재우(1824-1864)에 의해 선포됩니다. 동학은 선교사들이 전한 서학과는 정반대의 사상이나, 예수의 정신, 곧 하나님은 여기 있거나 저기 있는 것이 아니라 네 안에 있다(시천주)는 말씀과 본질에서 맞닿아 있습니다. 시천주는 결국 사인여천(事人如天)으로 이어지듯 예수의 사상은 사람을 하늘처럼 여기는 개벽의 길을 열어갑니다.

p. 171~172



존재가 자기 자신으로 드러나면, 말은 타자의 복제에서 벗어나 “자기 말”이 됩니다. 자기 말은 독단이나 고집과 다릅니다. 오히려 영의 사유에서 비롯된 말은 타자를 살리고 관계를 회복시키며, 현실에 생명과 평안을 불러옵니다. 그러한 말하기는 “거룩함”의 표현이며,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징후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라”는 요청은 “이제 네가 너의 말로 말하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타자의 대본에서 벗어나, 영의 사유로 전환된 존재가 자기 언어를 시작할 때, 그 순간이 바로 “천국이 가까이 온” 자리입니다.

p. 186



추천의 글


존재의 시선


에덴, 시작과 끝이 포개진 공간

아담은 ‘너’를 바라보았다

그 눈 속에서

자신과 세계가 동시에 반짝였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관계 속에서 깨어나는

존재의 자각이었다


아담이 이브를 사랑했다기보다,

이브를 통해

그는 자신과 세계의 질서를

처음으로 경험한 것이다


선악과 앞에서

사랑은 이름을 잃고,

형식을 얻는다

그녀의 떨림 속에서

그는 자유를 배웠고,

그녀의 눈물 속에서

인간 됨의 무게를 느꼈다


사랑은 대상이 아니라

존재의 힘이다

그 힘 안에서

인간은 자신과 세계를 동시에 품는다


아담이 사랑한 것은

그녀가 아니라,

그를 사랑하게 한

우주적 질서와 운명이었다


그 질서 속에서

모든 관계는 의미를 얻고,

모든 눈빛은 빛으로 남는다


사랑의 본질은

더 이상 이름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존재로 흐르고,

삶으로 스며들며,

세계 속에 스스로를 새긴다


<추천 글을 대신하여> 시인ㆍ이동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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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호
총신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철학교육을 전공하였다. 수도침례신학교와 중부대학교에서 기독교철학과 헬라어, 히브리어를 강의하였다. 저서로는 『베드로의 고백 그 허와 실』(1994)『그것이 나를 위한 것이냐』(1998)『예수의 믿음』(2018)『에덴의 뮈토스와 로고스』(2021)『유대신비주의 카발라와 생명나무』(2021)『성서 그리고 도마복음 Vol 1, 2, 3』(2024-25) 『신죽음과 좀비신학』(2025) 등이 있다. 원어성서원 刊 『스테판 원어성경』 데이터 작업과 편집에 참여하였으며 격월간지 『형상과 글』을 창간하기도 했다. 현재 유튜브 방송 '김창호 TV'를 운영하고 있으며, 원어 성경을 토대로 한 해설 요한계시록과 창세기, 산상수훈, 주기도문, 카발리즘, 도마복음, 로마서, 히브리서 등 동영상 약 700여 편이 업로드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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