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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병

소녀는 항상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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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일

구덩이

2022년 09월 16일 출간

ISBN 9791197977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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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 볼 일 없는 번역가로 살아가던 유진은 9호선 급행 지하철에서 처음으로 공황발작을 경함하게 된다. 하루하루 실체 없는 두려움과 싸우던 유진은 용기를  긁어모아 다시 지하철을 타려 하지만 가능한 일이 아님을 알고 실의에 빠진다. 


 그때 나타난 작고 귀여운 바가지 머리의 유나. 이 맹랑하지만 따뜻한 유나는 함께 여행을 떠나자고 제안한다. 유진은 소녀 유나가 안내한 미지의 장소로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이 미지의 여행 속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던 아픈 기억을 마주하게 된다. 어린 딸을 두고 스스로 삶을 바다에 던져버린 어머니에 대한 애증. 그 어머니 역시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대학생이 되어 만난 남편과의 불행한 결혼생활로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가슴이 시릴 정도로 아프고 지워 버리고 싶은 기억이 있다. 그러나 그 기억은 낱낱이 꺼내 돌아보지 않으면 떨쳐버릴 수가 없다. 차곡차곡 쌓아둔 과거의 낱장들을 펴야만 할 때가 생긴다면 제안하지 않고 조언하지 않은 채 가만히 옆에 있어 줄 무엇이 간절하다면, 바로 이 책이 그 무엇이 되어 독자 여러분을 내면의 평안으로 안내할 것이다. 


목차


반려병

소녀를 만나다

함께 가기로 하다

바비 인형의 묘지

고장난 유람선

네브레시왕국의 위기

완벽한 세탁소 (1)

완벽하지 않은 부부

완벽한 세탁소 (2)

요란한 놀이터 (1)

숨기려는 게 아니야!

요란한 놀이터 (2)

두려움

고양이 마을

나도 고양이인가

다리 밑 작은 캐비닛

난 말이야

소극장 사람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이카의 여행

거울의 방

소녀는 항상 있었다

그리고 김지민 이야기


본문 펼쳐보기


□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문과 함께 닫힐 때쯤 작은 소리로 “저 좀 내릴게요.” 용기를 내 보았지만 기관사가 더 큰 소리로 다음 열차를 이용하라는 말과 함께 문을 닫았다. 노량진역까지 대략 4분 정도의 주행 시간이 억겁같이 흘러갔다. 되도록 내가 끼어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으려고 천장을 바라보려 한껏 젖힌 얼굴로 눈물이 타고 흘렀다. ‘지금 죽는구나!’ (10쪽)


□ 더 나이가 든 이후 내 어릴 적 습자지는 기억 저편으로 멀어져 갔고, 난 굳센 어른이 되어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나는 습자지를 잃어버린 이후 계속 이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나의 습자지를 찾아주는 마법의 단어. 소중한 사람. 소중한 사람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던가?

기억에 없겠지만 그래도 한두 번은 들어보지 않았을까마는 지금만큼 내가 듣고 싶어 하는 정확한 순간에 들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25쪽)


□ 앞뒤가 전혀 맞지 않아! 하늘나라의 천사 수급 불량 사태를 우리 엄마로 충당한다는 것도, 하늘에서 가장 예쁜 천사가 된 엄마가 지켜봐 주고 있는 내가 불쌍한 것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잖아. 하지만 할머니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없었어도 할머니가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지. 그래서 할머니라도 마음 아프지 않게, 울지 말고 씩씩해야지 하는 생각을 했어. 난 어린아이의 몸뚱이에 할머니 마음을 가진 어린아이였었나 봐. (140쪽)


□ 나이가 어릴 때는 할머니의 각본에 잘 속아 넘어갔지만, 머리가 굵어지면서 할머니가 다른 사람들과 하는 이야기를 통해 엄마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걸 알 수 있었어. 할머니가 그 사실을 목숨처럼 지키고 싶어 하는 비밀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기에 한 번도 물어보지는 않았어. (143쪽)


□ 하지만 나를 도와주러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쳐 버릴 것 같은 잔인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이제는 꺼내 달라고, 도와 달라고 소리칠 기운도 없었다. 누군가 작정하고 나를 괴롭히려는 것이라면 차라리 빨리 죽여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마 나와 뿌리 깊은 원한이 있어 이런 곳에 나를 가두고 괴롭히는 것이겠지. (159쪽)


□ 이카의 눈빛이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이내 결심한 듯 몸통을 들어 가시덤불과 실타래처럼 엉켜있는 꼬리를 바라봤다. 그리고 결심한 듯 눈을 꼭 감고 깊게 심호흡도 하고 비장하게 꼬리를 잘라 내기 시작했다. 고통에 신음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이카는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자유의 몸이 되었다. 피는 여전히 흐르고 있었고 다리는 바로 다시 자라지 않았지만 이카는 꼬리가 자랄 것이라는 희망으로 버틸 수 있었다. (182쪽)


□ 아빠가 돌아가시고 외삼촌 집으로 들어왔을 때 여기가 바닥인가 싶었지만 바닥이 아니었고, 대학에 합격하고 등록금을 달라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아 등록일 마지막까지 애를 태우고 있었을 때도 바닥이 아니었다. 덜컥 임신이 되어 달아날 기회를 잃었을 때도, 학교를 자퇴당해 돌아갈 곳이라고 생각했던 학교와의 끈도 영원히 떨어져 버렸을 때도 역시 바닥이 아니었다...진짜 최악은 최악이니 뭐니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망가졌을 때다. (209-210쪽)


□ 그리고 몇 년이 지나 마지막 가족 여행에서 나는 버틸 수 없이 부풀어 버린 고통의 무게를 바다에 던져 버렸다. 단 한 순간 지독하게 이기적인 선택이었다. (2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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