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무성전 시대 - 포로기의 역사 문헌 그리고 신학에 대한 개요
질 미들마스(Jill Middlemas)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12,000 10,800원
성경으로 여는 세계사 2
김성일(1) | 신앙계㈜
12,000 10,800원
성경으로 여는 세계사 3
김성일 | 신앙계㈜
12,000 10,800원
[개정판] 요세푸스 2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 생명의말씀사
44,000 39,600원
[개정판] 초기 기독교와 로마 사회
이상규(4) | SFC출판부
33,000 29,700원
신약교회 사관에 의한 동시대 두 세상 4 (중세시대편)
정수영(1) | 쿰란출판사
25,000 22,500원
중세교회사
정원래 | 솔로몬(도)
54,000 48,600원
더 급한 곳으로 가라
이상규(4) | 대장간
10,000 9,000원
거꾸로 읽는 교회사
최종원 | 복있는사람
19,500 17,550원
[개정판] 요세푸스 1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 생명의말씀사
44,000 39,600원
저항하라 마리 뒤랑의 노래
성원용 | 국민북스
12,000 10,800원
기독교 로마를 뒤흔든 낯선 종교
니제이 굽타 |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IVP)
19,000 17,100원
기독교 우리가 숨 쉬는 공기
글렌 스크리브너 |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IVP)
19,000 17,100원
잔혹함의 성경 번역사
해리 프리드먼 | 브니엘(도)
25,000 22,500원
계시종교 러시아 자연종교 중국
강희창 | 통독원
12,000 10,800원
초기 기독교의 박해를 지나, 교회가 걸어온 길 위에서 우리는 수많은 하나님의 밀알들을 만난다. 그들의 붉은 피 위에 세워진 교회, 권력의 정점에 선 교회, 그리고 개혁의 망치 소리에 깨어난 교회. 이 책은 교회의 빛과 그림자를 따라가며 기독교세계의 민낯을 그려낸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품고, 저자는 35일 동안 7개국 22개 도시를 걸었다. 그 여정 속에서 만난 16-17세기 신앙의 흔적을 사진과 명화에 담아 독자가 교회사(敎會史)의 숨결을 느끼고 믿음의 길을 새롭게 사유하도록 이끈다.
[추천 대상]
• 중세 유럽과 기독교 역사 등, 해당 분야에 관심 있는 일반 독자
• 학생 및 청소년을 비롯한 일반인
머리말
―
제 Ⅰ부|겨자씨 기독교
제1장|박해에서 기독교제국으로
1. 유대교의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
2. 기독교제국이 된 로마
제2장|중세 초기(Early Middle Ages)
A. 게르만족의 기독교화
1. 게르만족의 대이동
2. 프랑크 왕국 – 메로빙거 왕조
B. 기독교제국의 교회
1. 대 그레고리우스 1세
2. 서로마 황제 - 샤를마뉴
3. 성상숭배(Iconodulism) 금지
4. 이코노클라즘(Iconoclasm) vs 이코노둘리즘(Iconodulism)
5. 게르만족의 세계관
제3장|중세 중기(High Middle Ages)
A. 교회조직과 교회정치
1. 에큐메니컬 공의회
2. 보편적인 교회
3. 서임권 투쟁 – 카노사의 굴욕
4. 십자군 원정
5. 교회 대분열(The Great Western Schism)
6. 제4차 십자군 - 라틴 제국
7. ‘하나님의 대리자’ 인노켄티우스 3세(1198-1216)
제4장|중세 후기(Late Middle Ages)
1. 15세기 인문주의자들이 규정한 ‘중세’
2. 페트라르카 ‘아드 폰테스’
3. 르네상스의 빛과 그림자
―
제 Ⅱ부|순전한 기독교의 길
제1장|여명:종말의 징조들
1. 아비뇽 유수(1309-1377)
2. 14세기 흑사병(1346-1353)
3. 종교개혁의 불씨 - 존 위클리프
4. 서방교회 대분열(1378-1418)
5. 백조를 기다리다 – 얀 후스
제2장|종교개혁의 여명
1. 로렌초 발라 – ‘콘스탄티누스의 증여’
2. 금속활자 인쇄술
3. 동로마 제국 멸망
4. 종교개혁의 트리거
5. 르네상스 교황들
6. 에라스무스 – 헬라어 신약성경
7. 면벌부(Indulgentia)
제3장|16세기 종교개혁
A. 회복의 길
1. 종교개혁이란?
2. 마르틴 루터 – 하나님의 손에 들린 횃불
B. 과녁을 벗어난 운동
1. 독일 농민전쟁(1524-1525)
2. 토마스 뮌처
제4장|종교개혁 그리고 정치
1.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
2. 보름스 제국의회(1521)
3. 제5차 이탈리아 전쟁(1526-1530) – 로마의 약탈
4. 제2차 슈파이어 제국의회(1529)
5.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1535)
제5장|반종교개혁–재가톨릭화
1. 반종교개혁 - 트리엔트 종교회의(1545-1563)
2. 슈말칼덴 전쟁(Schmalkaldic War, 1546-1547)
3.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Peace of Augsburg, 1555)
4. 30년 종교전쟁(The Thirty Years’ War, 1618-1648)
5. 베스트팔렌 평화조약(Peace of Westfalen, 1648)
6. 경건주의 발흥
―
제 Ⅲ부|유럽의 종교개혁
제1장|취리히 종교개혁
A. 취리히
1. 울리히 츠빙글리
2. 개혁의 요람 – 그로스뮌스터 교회
3. 그로스뮌스터 교회 츠빙글리문
4. 취리히 종교개혁의 명암
5. 검과 성경을 든 츠빙글리 동상
6. 소시지 사건
7. 레오 유드와 장크트페터스 교회
8. 재세례파 첫 순교자 펠릭스 만츠
B. 종교개혁자들과 도시들
1. 로잔 - 피에르 비레
2. 뇌샤텔 - 기욤 파렐
3. 스트라스부르의 개혁자들
4. 마르틴 부처
제2장|제네바 종교개혁
1. 장 칼뱅
2. 제네바 아카데미 - 테오도르 드 베즈
3. 바스티옹의 종교개혁의 벽
제3장|잉글랜드 종교개혁
1. 수장령(Act of Supremacy)
2. 메리 튜더 vs 엘리자베스 튜더
3. 청교도
4. 잉글랜드 장로 정치
5. 청교도 혁명
6. 명예혁명
제4장|스코틀랜드 종교개혁
1. 스코틀랜드 장로회주의
2. 패트릭 해밀턴의 순교
3. 스코틀랜드 신앙고백
4. 존 녹스의 귀환
5. 메리 스튜어트
6. 앤드류 멜빌과 《제2 치리서》
제5장|프랑스 종교개혁
1. 프랑스 개혁교회 태동 – 모(Meaux)
2. ‘위그노’로 불린 사람들
3. 앙부아즈의 음모(Conspiracy of Amboise, 1560)
4. 바시 학살 – 프랑스 종교내전 촉발(1562-1598)
5.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대학살(1572)
6. 톨레랑스 – 낭트 칙령(Edict of Nantes, 1598)
7. 라로셸 – 위그노의 도시
8. 태양왕 루이 14세(Louis XIV, 1638-1715)
9. 위그노 박해
제6장|네덜란드 종교개혁
1.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순교자들
2. 벨직 신앙고백서
3. 스페인의 광기
4. 빌럼1세 오라녜 공
5. 브레다의 항복
6.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7. 뉴욕 그리고 언더우드
―
* 참고·인용 자료
* 연대표
제1장|박해에서 기독교 제국으로
유대교의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
역사는 늘 그러하였다. 새로운 사상이 등장할 때마다 기존 체제는 그것을 쉽게 ‘이단’이라고 규정하였다. 여기에는 다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틀림으로 규정하는 데서 오는 차별과 불관용이 뒤따른다. 마찬가지로 유대사회에 새로운 세계관의 출현은 전통 질서를 훼손하고 자신들의 정체성과 신앙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이단이며, 수천 년간 쌓아올린 종교적 권위를 뒤흔드는 이단이었다. 더욱이 예수와 그를 따르는 무리는 유대의 유력한 가문 출신이 아닌, 별볼일 없는 촌뜨기들이었다. 유대 지도자들은 로마인 총독 본디오 빌라도를 겁박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였으며, 헤롯 아그립바에게 야고보가 죽임 당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다. 나아가 예루살렘 멸망 후 바리새파가 재건한 얌니아 종교회의Council of Jamnia에서 유대–기독교인을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그들은 ‘아도나이 엘로힘’을 함께 예배하던 자신들의 가족이고 유대공동체의 형제들이었다. 그들은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난 낯선 존재가 아니라 구약성경의 하나님을 믿고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바 대로 오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유대–기독교인들이었다. 그들에게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오리라’ 하신 그분을 보고도 믿지 않은 유대인들과 ‘오리라’ 하신 분의 오심을 믿은 유대인들이었다는 점이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 자신들의 형제를 박해했던 유대 선민세계관과 마찬가지로, 로마 교회 역시 성경과 사도적 가르침으로 회복하자는 형제들을 이단으로 규정하여 불태우고 참수하였다. 이는 유대교의 선민 세계관과 로마주의 세계관은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었다. 자신들의 전통과 사상에 도전하는 모든 것에 불관용을 드러낸 무도함은 인류 역사에서 박멸되지 않을 악성 바이러스와 같은 것이었다.
유대인들이 기독교인을 핍박하던 대로 유대교 역시 로마 황제들로부터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그들의 기독교에 대한 불관용은 자신들에게도 돌아오게 될 불관용이었다. AD 135년 하드리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바르 코크바Bar Kokhba의 반란, 곧 제3차 유대–로마 전쟁이 일어나 50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학살되거나 노예로 팔려갔고, 유대인은 예루살렘 출입과 할례를 금지당하였다. 또한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은 유피테르 신상(神像)과 베누스 신전에 머리를 조아리는 이교도들의 우상숭배로 더럽혀졌다. 그뿐 아니라 예루살렘은 아일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로, 유대 지역은 시리아 팔레스티나Syria Palaestina로 개명해 버렸다. 한편, 로마 제국의 옥타비아누스는 평화시대, 곧 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이룩한 아우구스투스였고 메시아였다. 이제 로마의 전통적인 제신(諸神)공경은 황제숭배와 여신숭배Dea Roma로 바뀌었다. 이러한 로마 제국에서의 초기 기독교 박해는 네로 황제로부터 시작되어 300여 년 동안 10명의 황제들에 의해 일어났다. 그중에 로마 전역에서 황제의 주도 아래 자행된 맹렬한 대박해는 3세기 초 세베루스와 3세기 중엽의 데키우스, 그리고 4세기 초 디오클레티아누스 치하에서 일어났다. 황제 네로는 AD 64년 로마 대화재의 원인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려 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베드로와 바울을 죽이고 자신의 모친과 아내까지 죽인 천하의 미치광이 네로는 로마 제국 최초 기독교 박해자로 기독교회사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을 이름이 되었다. 도미티아누스는 황제 신격화에 반대한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반사회적이고 비도덕적인 유언비어를 유포하고, 로마에서 발생한 전염병이나 사회문제 원인을 그들 탓으로 돌려 죽였다. 이때 디모데Τιμόθεος, c. AD 90가 죽임을 당하였다. 108년경 트라야누스 황제는 안티오크(안디옥) 감독 이그나티우스를 산 채로 사자에게 던져 물어 뜯겨 죽도록 하였다. 155년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서머나 감독 폴리카르포스Polycarp가 86세에 순교하였다.
161년 『명상록』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는 아시아와 프랑스에서 구경꾼들이 자지러질 정도의 끔찍한 방법으로 기독교인들을 죽였는데, 기독교인들은 그의 잔인함보다 더 용감하게 순교를 받아들였다.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 100- c.165으로 불리는 『변증』First/Second Apology의 유스티누스가 그의 치하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세베루스 황제 치하에서 『이단논박』Against Heresies으로 영지주의에 대항한 리옹의 이레나이우스가 참수형을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249년에는 데키우스 황제가 숭배를 거부한 반역자들, 곧 그리스도인들을 배교자로 만들어 내는 일에 총력을 다하였다. 이 전략은 목숨을 뺏는 것보다 더한 해악을 기독교에 끼쳤다. 수천 명의 배교자들이 속출하였고, 돌아온 배교자들에 대한 처분을 놓고 교회는 논쟁과 분열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Origenes는 순교한 부친과 달리, 살아남게 되었다. 그다지 포악하지 않았던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그리스도인들을 음해하는 마술사의 꼬임에 넘어가, 통치기간 내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테르툴리아누스의 후계자 키프리아누스Cyprianus, 258를 참수하였다. – 중략 - 한편, 로마 황제들의 혹독한 박해 속에서 교회는 이단에 대항할 논박과 변증이 절실히 필요했다. 당시 마르키온Marcion과 영지주의Gnosticism가 이단적인 교리 체계를 갖추고 성행했기 때문이다. 이에 맞설 적합한 인물은 이레네우스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그리고 테르툴리아누스와 오리게네스와 같은 교부들이었다. 이단 논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박해가 종식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하늘의 부름을 받은 테르툴리아누스는 『변증론』Apologeticum 제50장에서 ‘그리스도인의 피는 씨앗이다’라고 밝혔다. 곧 “Semen Est Sanguis Christianorum”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p. 21~24
―
1. 로렌초 발라 – 콘스탄티누스의 증여
바젤 종교회의(1431–1449)는 교회의 최고 권위가 교황에게 있는가, 아니면 공의회, 곧 종교회의 전체에 있는가를 둘러싼 ‘수위권 논쟁’에서 비롯되었다. 종교회의는 “교황도 종교회의의 결정에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공의회 우위’를 내세웠으나,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Eugenius IV, r. 1431-1447는 이에 반발해 바젤 회의를 해산하라고 명령했지만 종교회의는 이를 거부하고 회의를 지속했다. 결국 1439년, 교황은 코시모 메디치Cosimo de’ Medici의 지원 아래 피렌체에서 새로운 종교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는 동방교회와 아르메니아 사도교회가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며 교회 일치를 선언했다. 그러나 이 합의는 곧 철회되었다. 이처럼 논쟁적인 교황의 수위권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오랫동안 인용되었던 「콘스탄티누스의 증여」Donatio Constantini는 4세기의 문서로 알려졌으나, 로렌초 발라Lorenzo Valla, 1407-1457에 의해 8세기 라틴어로 작성된 위조문서임이 밝혀졌다.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 주교 실베스터 1세에게 수여해 준 것으로 알려진 이 문서는 330년 5월 11일, 황제가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기면서 로마 교회에 남겨 준 ‘기증’으로 포장되었다. 이후 로마 주교들은 세속 군주들과 권위를 다툴 때마다 「콘스탄티누스의 증여」를 내세워 교황권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핵심 논거로 사용했다. 그럼에도 로렌초 발라 이전에는 그 진위를 의심한 이가 아무도 없었다. 단테는 『신곡』Divina Commedia의 「지옥편」에서 이렇게 외친다. “아, 콘스탄티누스여! 얼마나 큰 악의 근원을 네 회심이 가져왔던가!” 그는 교황권이 세속 권력을 탐하게 된 원인을 그 위조문서의 허구적 유산에서 보았다. 1440년 교황주의자들에게 야박한 운명의 장난은 인문학자 로렌초 발라Lorenzo Valla, 1407-1457로부터 시작되었다. 여느 르네상스 군주들처럼 예술과 학문을 후원한 아라곤과 시칠리아의 왕 알폰소의 궁정에서 활동한 그는 언어학적 분석에 탁월했다. 그런데 히에로니무스가 번역한 라틴어 불가타 성경에 수많은 오류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이에 『신약성경 주석』Annotationes in Novum Testamentum을 집필하며 불가타와 원문을 비교·분석하고, 오역과 신학적 왜곡을 바로잡고자 했으나 교회의 보수적 전통과 충돌할 위험이 컸기에 그의 저서는 생전에 출간되지 못했다.나폴리 왕국의 주도권을 둘러싼 세속 군주들의 쟁탈전이 한창이었다. 그 와중에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는 나폴리가 교황령에 속한다고 주장하며 알폰소 왕의 심기를 거듭 뒤틀리게 했다. 긴장된 정세 속에서 완곡어법(婉曲語法)을 모르는 발라는 알폰소 왕에게 꽤 쓸만한 펜과 입이 되어 주었다. 그의 탁월한 라틴어 실력은 단지 불가타 성경의 오류를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교황청Curia Romana의 권위를 지탱해 온 문서들의 비밀을 꿰뚫어 보았다. 발라는 그 결과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콘스탄티누스의 증여의 위조에 관한 논고』De falso credita et ementita Constantini donatione declamatio, 1440를 저술하여, 교황권의 신성한 근거를 무너뜨리는 불온한 진실을 세상에 던졌다.
“설령 「콘스탄티누스의 증여」가 사실이라고 하여도 그것은 무효이다. 콘스탄티누스는 그럴 권한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정이야 어떻든 교황청의 범죄들이 그것을 무효로 만들었다. 만일 이 문서가 위조라면 교황들의 세속적인 권리는 천년 된 왕위 찬탈일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속권력으로부터 교회의 부패가 나타났고 이탈리아 전쟁으로 나타났으며, 위압적이고 야만적이고 폭군적인 사제 지배가 나타났다.”
p. 95~96
―
2. 마르틴 루터 – 하나님의 손에 들린 횃불
1483년 11월 10일, 작은 광산촌 아이슬레벤에서 훗날 16세기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어 올릴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태어났다. 구리광산업으로 자수성가한 그의 부친은 아들이 고된 노동을 이어받지 않고 법률가로서 안정된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마친 루터는, 벼락을 맞을 뻔한 사건을 계기로 곧바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입회하여 사절단으로(1510-1511) 로마를 방문했다. 이때 교회의 실상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아 영적 고뇌에 빠진 그를 수도회는 비텐베르크로 전임시켰고, 그는 1512년에 신학박사 학위 취득 후 성서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이 무렵 로마서 1장 17절을 통해 복음의 진리를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는 마침내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 교회문에 《95개조 논제》Die 95 Thesen를 게시했다. 이 라틴어로 된 문서는 누구나 쉽게 읽도록 만든 것이 아니라, 신학자들과 학문적 토론을 촉구한 신학적 테제였다. 당시 비텐베르크는 2천여 명 규모의 작센 내 작은 소도시에 불과했다. 주민들 다수는 독일어를 제대로 읽고 쓰지 못하였고 사제들 중에도 문맹자가 적지 않았다. 그러한 도시에서 1502년 작센의 현공(賢公) 프리드리히 3세(r. 1486-1525)가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인가를 받아 비텐베르크 대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대학은 설립 초기에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지만, 곧 루터와 멜란히톤을 중심으로 한 신학적 논쟁과 개혁운동의 본거지가 되면서 종교개혁의 중심지로 부상하게 된다.
p. 118
―
2. 메리 튜더 vs 엘리자베스 튜더
잉글랜드 종교개혁을 위한 여정에는 끊임없이 장애물이 나타나 개혁을 바라는 이들의 인내심을 시험했다. 아! 그들이 원치 않는 또 다른 장애물이 나타났다. 헨리 8세의 큰딸 메리 튜더Mary Tudor였다. 가톨릭 세력에 힘입어 여왕으로 즉위한(1553) 그녀는 재가톨릭화의 광풍을 일으켰다. 헨리 8세가 메리를 사생아로 선포하고 공주로서의 지위와 왕위 계승권을 박탈한 20여 년의 세월, 모친 캐서린이 겪은 수모까지 갚아주려는 듯, 잉글랜드와 스페인 가톨릭 세력의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자신보다 열한 살이나 어린 5촌 펠리페 2세와 결혼하고 개혁교도들을 죽이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가톨릭 맹주 에스파냐의 왕비이자 잉글랜드 여왕이 된 그녀의 손에서 5년 동안 순교한 사람은 무려 300여 명이나 되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런던 주교 니콜라스 리들리Nicholas Ridley와 우스터 주교 휴 래티머Hugh Latimer가 있다. 1555년 10월 16일, 옥스퍼드 밸리올 칼리지Bailiol College 맞은편 공터에 끌려온 래티머는 자신들을 화형시킬 장작더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용기를 내게, 리들리. 남자답게 행동하세.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잉글랜드에 결코 꺼지지 않을 촛불을 밝히게 될 걸세.”
래티머와 리들리에 이어, 1556년 3월 21일, 화형을 당한 토머스 크랜머는 한때 변심했다가 개혁신앙을 고백했는데, 신앙철회 각서를 썼던 자신의 오른손을 타오르는 불 속에 먼저 집어넣었다고 전해진다. 약 5년간의 통치 기간(1553. 7–1558. 11) 내내 개혁교도를 박해한 잉글랜드 최초 여왕 메리 1세Mary I, 1516–1558도 죽음 앞에서는 별 수 없었다. 제아무리 한 나라의 군주라 할지라도 창세기의 증언 대로 결국 “~ 해를 살다가 죽다”로 생을 마쳤다. 인간의 삶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고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일 뿐,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시간이 아니다.
p. 300
―
5.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대학살(1572)
샤를 9세가 콜리니 제독의 암살 배후를 밝혀내라고 엄중히 명령하자, 배후가 밝혀질까 두려웠던 앙리 드 기즈 공작이 역공에 나섰다. 8월 23일 밤, 그는 “폐하! 반역 모의입니다. 제독이 폐하를 속이고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하고 샤를 9세에게 탄원을 하였다. 콜리니 제독에 대한 암살 미수가 있은 지 하루만의 일이었다. 샤를 9세의 주변에는 믿고 의지할 만한 위그노 귀족들이 많았기 때문에 국왕의 고뇌가 깊었다. 아직 사리분별이 부족한 22살의 국왕은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전전긍긍하였다. 이에 기즈 공작과 모후 카트린이 승인을 받아내기 위해 심약한 그를 집요하게 압박했다. 자정이 될 때까지 고심하던 샤를 9세는 결국 콜리니 제독을 포함한 위그노 지도자 여섯 명의 체포안에 동의하였다.
“오 하느님! 공작 그대가 콜리니를 죽여야 한다고 하여 나는 수락하였소! 그런데 이제 또 다시 위그노들을 전부 죽여야 한다니, 나를 비난하는 사람은 한 명도 살려둬서는 안된다니…, 아! 죽이시오. 전부 죽이시오!”
이들은 한발 더 나아가 위그노들을 전부 죽이라는 명령까지 받아냈다. 샤를 9세는 위그노들을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고 털썩 주저앉았다. 의자 손잡이를 움켜쥔 그의 하얀 손이 파르르 떨렸다.
“아, 콜리니….”
샤를 9세는 자신을 재촉하는 모후 카트린과 기즈 공작을 매섭게 쏘아보고는 도망치듯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사이에 시간은 자정을 넘겨 8월 24일, 그들이 거룩하게 여기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이 되었다. 앙리 드 기즈 공작이 대기 중이던 자신의 민병대에게 명령을 내렸다.
“신호를 보내면 일제히 파리로 진입해 성문을 닫고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라. 흰 천을 두르지 않은 위그노들을 색출하여 죽여라.”
깊은 어둠에 잠긴 폭풍 전야의 파리, 괴기스러운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새벽 2시가 지났다. 루브르궁 건너 생제르맹 록세루아 성당Église Saint–Germain–l’Auxerrois 종소리가 뗑그렁! 뗑그렁! 침묵을 깨뜨리며 퍼져 나갔다. 순식간에 파리의 성문은 굳게 닫히고 위그노 학살이 시작되었다.
p. 385-386
5. 브레다의 항복
「브레다의 항복」La réddition de Breda은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 1599-1660가 그린 그림이다. 그의 생애 대부분을 스페인 펠리페 4세Felipe Ⅳ de España, r.1621-1665의 궁정화가로 지내면서 초상화를 그렸으나, 이 작품은 그가 유일하게 유럽의 30년 전쟁 중에 그린 전쟁화이다. 이 작품은 전략적 요충지인 네덜란드 남부 브레다 지방이 함락된 사건을 묘사하였다. 1625년 4월 23일, 마우리치가 사망하기 직전에 남부 브레다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리하여 6월 5일 네덜란드 총독 유스티누스 판 나사우Justinus van Nassau, 1559–1631가 스페인의 명장 암브로시오 스피놀라Ambrogio Spinola에게 브레다의 열쇠를 건네주고 있는 장면이다. 벨라스케스는 그림 속 장면 좌우에 승자와 패자를 나누어 배치하였다. 그는 승자인 스페인군을 표현하기 위하여 오른쪽 배경에 질서정연하게 수직으로 세운 창들을 그려 넣었다. 반면에 패자인 남부 플랑드르 군인들의 모습은 전열이 흐트러진 상태로 묘사하고 그 중앙에 열쇠를 주고받는 두 지휘관을 그려 넣었다. 이 그림은 얼핏 보더라도 전투의 현장, 더구나 항복하는 과정에서 있을 법한 적대감은 보이지 않는다. 연기를 내뿜는 음울한 전쟁터의 배경과는 달리, 패자에 대한 자비가 느껴진다. 승리한 장군이 말에서 내려 패장(敗將)을 위로하는 하는 듯한 장면은 ‘톨레랑스 스페인’을 강조하려는 화가의 의도일 뿐이다. 항복의 상징으로 벨라스케스의 그림에 등장하는 열쇠는 전략 요충지 브레다를 차지하기 위한 장기적인 포위전의 산물이었다. 1624년 8월, 제노바 출신 스피놀라가 도시를 봉쇄하면서 시작된 브레다 공성전Siege of Breda, 1624–1625은 이듬해 6월, 네덜란드 수비군의 항복으로 막을 내렸다. 마우리치의 이복형인 유스티누스 판 나사우의 협상으로 네덜란드 수비군은 안전하고 질서정연하게 철수할 권리를 보장받았으며, 브레다 시민들에 대한 약탈금지 조건도 포함되었다. 이렇듯 브레다는 스페인에 넘어갔다. 그러나 브레다 공성전의 승리는 펠리페 4세에게 기쁨이 아니라 막대한 전비와 인명 손실을 가져왔으며, 스페인 제국의 재정에 무거운 짐을 더하였다. 1635년 펠리페 4세가 새 궁전의 알현실을 장식하기 위해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린 「브레다의 항복」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불과 2년 뒤인 1637년 빌럼 1세의 막내아들이자 프랑스 가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의 외손자인 프레데리크 헨드리크가 이끄는 네덜란드군이 브레다를 탈환하였다. 이후 10년이 흐른 1648년, 펠리페 4세는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에 서명하며 마침내 ‘유럽의 30년 전쟁’이 종결되고,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은 네덜란드의 독립을 공식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p. 441~443
―
조선의 이수정과 언더우드
1883년 12월 13일 《미셔너리 리뷰 오브 더 월드》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에 한 조선인의 편지가 실렸다. 「미국 기독교인들에게 드리는 이수정의 인사」라는 긴 제목의 편지는, 요코하마에 체류 중이던 이수정이 조선에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간절히 요청한 내용이었다. 당시 인도 선교를 준비하고 있던 언더우드는 이 편지에 깊이 감동을 받고,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에 조선 선교사로의 파송 가능 여부를 문의하였다. 언더우드는 그에 앞서 개혁교회(RCA) 선교부에도 문의했으나 거절당한 바 있었다. 그런데 이른바 ‘조선의 마케도니아인’으로 불린 이수정의 호소는 언더우드의 선교 열정을 일깨웠고, 마침내 북장로교 선교부의 마음까지 움직였다. 그 결과 1884년 7월 28일, 언더우드는 조선 선교사로 임명 받고 그해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항을 출발했다. 1885년 1월 25일, 매서운 바닷바람의 환영을 받으며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이수정을 만나 조선어를 배우며 조선에서의 선교 준비에 힘썼다. 드디어 4월 5일, 제물포항(인천항)을 통해 조선에 입국한 언더우드는 이틀 뒤 곧장 서울로 상경하였다. 그는 입국 직후인 4월 10일부터 광혜원의 약제사로 일하면서 선교사로서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는 조선인에게 최초로 세례를 베풀며, 주어진 사명에 따라 조선 선교의 길을 열어 나갔다.
p. 453
| 저자 | (기본값:제작사 정보 미제공) |
|---|---|
| 크기 | 전자책의 경우 파일의 용량 |
| 쪽수 | 전자책의 경우 제외 |
| 제품 구성 | 전집 또는 세트일 경우 낱권 구성, CD 등(기본값:해당사항없음) |
| 출간일 | (기본값:제작사 정보 미제공) |
| 목차 또는 책소개 | 상세화면 표시 |
무성의, 비방, 도배, 도용, 광고성 평등 상품평 성격에 맞지 않을 경우 사전 통보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배송비
- 라이프북의 배송비는 15,000원 미만으로 주문하실 경우 3,000원의 배송비가 부과됩니다. (단,제작처 개별발송 상품은 제작처의 배송비정책을 따릅니다)
- 도서,산간 지방의 경우 및 퀵 서비스요청은 배송정책과 관계없이 추가 배송비는 고객님께서 부담하셔야 합니다.
배송기간
- 신용카드 결제나 핸드폰,실시간 계좌이체는 즉시 결제확인이 가능하며,무통장입금의 경우 입금하신 순서대로 결제확인 후 출고가 이뤄집니다.
(단,토요일,일요일,공휴일을 제외한 평일 9시 이전까지 결제확인 된 주문건에 한해서만 당일출고 됩니다.)
- 배송기간은 출고 후 최소 1일(24시간)~최대7일 정도 후 주문하신 상품을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단,토요일/공휴일제외)
•도서는 개정판/재판이 출간될 경우 가격이 변동될 수 있어 주문취소 및 주문변경을 요청드릴 수 있습니다.
•상품의 실제 색상은 사용하시는 모니터에 따라 다를 수 있사오니 이점 양해부탁드립니다.
상품에 대한 주문취소/교환/반품/환불정보를 확인하세요!
구매확정하시거나 출고완료 후 10일이 지난 주문건은 교환/반품이 불가하여,마이페이지에서 신청버튼이 조회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