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세푸스는 유대의 제사장 가문 엘리트 귀족 출신으로 1세기 제정 로마 시대에 유력한 정치가이자 군대 사령관으로, 뛰어난 학자이자 역사가로 활약한 인물이다. 로마 제국의 속주였던 유대의 주도 예루살렘에서 제사장 가계의 아버지와 아스모네우스 왕가 혈통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요세프 벤 마티탸후라는 히브리식 이름이 있었지만 훗날 로마 시민으로 거듭나면서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플라비우스는 그의 보호자 역할을 하게 된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의 가문명에 따른 것이다.
그는 A. D. 66년에 발발한 제1차 유대-로마 전쟁 당시 갈릴리에 군사 총독으로 파견되어 저항군 부대를 훈련시키고 여러 도시와 마을을 요새화하는 등 군사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부자가 지휘하는 로마 제국 군대를 상대하기에는 중과부적이었고 결국 격퇴당하기를 반복하다가 요타파타 포위전에서 결정적으로 패하고 만다. 포위 공격에서 살아남은 다른 유대인 지휘관들이 항복하기를 거절하고 자결을 택한 반면 요세푸스는 여러 공교로운 이유로 로마군에 투항하는 길을 선택하였고 베스파시아누스 앞에 서서 그가 훗날 로마의 황제가 될 것이라는 예언 아닌 예언을 함으로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실제로 베스파시아누스가 로마 황제에 즉위한 후 그의 아들 티투스의 막료로 중용되었고 A. D. 70년 예루살렘 포위전 때는 로마를 대표해 유대군과의 협상에도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때는 저항군이었으나 정복군의 일원으로서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불타는 것을 실시간으로 목도하게 된 것이었다.
이후 정식으로 로마 시민권을 취득하고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옛 저택에 머무는 특혜까지 누리며 그의 저작 중 가장 유명하고 가장 권위 있는 작품들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죽을 때까지 로마인으로서 로마에 거주하면서 플라비우스 왕조 3대를 섬기는 특권층으로 살아가기는 했나 자신의 혈통과 굴곡 많은 인생사로 인해 요세푸스는 유대인을 향해서는 배신자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고자 평생토록 자기변명을 해야 했고 로마인을 향해서는 자존성을 위해 자신의 조상과 종교의 우수성을 변론하는 일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 끝자락에 같은 유대 땅에 실존했던 인물, 예언대로 멸망한 조국의 참극을 정복군으로서 지켜본 인물, 그리스 로마 문화에 경도된 학자이지만 히브리 역사의 위대함과 유대 율법과 문화의 탁월성을 강조하기를 멈출 수 없었던 인물, 그러한 모순적 족적으로 인해 그가 남긴 저작들은 전대미문의 사료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인정받아 왔으며, 그리하여 고대 학문의 불멸의 기념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