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평양에서 태어나 1947년에 월남했고, 한국전쟁 때 고 강원용 박사를 만나 기독학생운동에 첫 발을 들여놓았다. 군 복무를
마친 1960년도에 동양시멘트 공장에 취직하려 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한국학생기독교운동협의회(KSCC) 간사가 됐다. 이후 간사
직을 그만두고 함께 활동하던 레이니 선교사와 함께 유학길에 오른다. 미국 예일대학교에서 2년 간 공부한 뒤 돌아와 YMCA 전
국연맹 대학부 간사로 활동하다 한국기독학생회(KSCM), 한국YMCA 대학부가 통합한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의 초대총
무를 역임하게 된다.
1971년부터 79년까지는 아시아기독교협의회 도시산업선교부(CCA-URM)와 국제부(CCA-IA) 간사로 활동하면서 아시아 여러 나
라의 도시빈민, 농민, 산업노동자 조직과 민중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펼쳤다. 당시 CCA-URM은 일본 도쿄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
기 때문에 그는 나라 밖에서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국내에 계엄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오재식
은지명관, 김용복과 함께 익명으로 <한국 기독교인의 선언>을 작성하여 발표하였고, 이 선언문은 각 나라의 언론에 소개되면서
전 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관계자들을 설득하여 CCA-URM을 하면서 들어온 지원금 중 50퍼센트 이상을 한국
의 도시산업선교와 민주화운동을 돕는데 쓰이도록 했다. 지명관 교수가 TK生이라는 필명으로 일본의 잡지인 ?세카이?에 1973년
부터 1988년까지 15년간에 걸쳐 연재한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의 발행에도 그가 깊숙이 관계되어 있다.
그는 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린 뒤인 1982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선교훈련원장과 통일연
구원 원장(1982-88)을 맡아 지역 에큐메니칼 조직의 결성과 평화통일운동에 힘썼다. 특히 통일운동의 물꼬를 튼 도잔소회의
(1984), 남북기독교대표자와 WCC 관계자들이 최초로 만난 글리온회의를 성사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했으며, 역사적인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88선언)이 나오는 데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뒤 오재식은 제네바로 건너가 세계교회협의회(WCC)에서 개발국장과 제3국장(1988-93)을 맡으면서 제3세계 개발원조에서
생명문화 창조라는 의제로 가치관을 바꾸는 데 힘을 모았다. 임기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크리스챤아카데미 사회교육원
장(1994-96)과 참여연대 창립대표(1994-96)를 거쳐 한국 월드비전 회장(1997-2002), 월드비전국제본부 북한국장(2003-2005)을
맡아 활동했다. 그는 월드비전에 일할 당시 국수공장 건립, 수경재배사업, 씨감자프로젝트를 통해 대북협력사업, 대북인도지원
사업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2002년에는 그간의 대북사업과 활동을 인정받아 대한미국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했다.
그는 현재 아내 노옥신과 함께 살고 있으며 슬하에 1남 2녀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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