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코부스 꿀만은 1632년 네덜란드의 위트레흐트에서 태어나 위트레흐트에서 신학교에 다닐 때 그는 명석한 두뇌와 진실한
신앙심으로 두각을 나타낸 학생이었다. 대학 때 푸치우스 밑에서 공부한 야코부스 꿀만은 스승이자 멘토인 푸치우스에게 한
평생 충성했다. 1657년부터 1662년까지 꿀만은 코펜하겐과 브뤼셀의 파견 설교자로서의 사역을 감당했고, 지금은 플란드른
젤란트라고 불리는 슬라위스에서 대중적인 악습에 반대하여 제2의 종교개혁을 주창했다. 푸치우스파 설교자로서 야코부스
꿀만은 성직자의 소명에 간섭하는 정부와 충돌했다. 그는 크리스마스, 부활절 등을 ‘인간적인 축일’이라고 주장하며 그날의
행사를 강경하게 반대한다. 야코부스 꿀만은 도르트 총회에서 받아들인 공식 기도문들에 대해서는 강한 찬성을 나타냈으나,
종종 공식적인 자리에서 기도문을 불손하고 기계적으로 서둘러 읽는 것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했다. 교회 예배가 ‘틀에 박힌
의식’으로 전락한 것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이 충돌로 말미암아 그는 플란드른의 국유지로부터 추방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방랑생활을 시작했고 종종 비밀집회의 인도를 맡았다.
그 후 로테르담에 살다가 상황이 힘들어지자 암스테르담에 정착했다. 덴마크 전 대사관이던 시장의 도움을 받아 수많은 경건
서적들을 집필하고 번역하는 데 일생을 보낸다. 그는 고향인 위트레흐트에서 말년을 보내면서 저술과 번역 활동을 계속했다.
1695년에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여 푸치우스가 묻힌 위트레흐트 캐서린 교회 묘지에 묻혔다. 야코부스 꿀만은 제2의 종교
개혁에 작품으로서 시대에 영향을 미친 지도자들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가 남긴 저술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귀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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