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휫필드는 1741년 12월 16일 영국 글로스터(Gloucester)의 벨 여관에서 여관을 경영하던 토마스 휫필드(Thomas Whitefield)
와 엘리자벳(Elizabeth)을 부모로 하여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죄에 대한 자각을 했고 성령께서 자신에게 감화를 주
고 있음을 느꼈다고 고백한 대목에서,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목사가 되기를 원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큰 그릇"으로 빚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리고 어머니의 재혼으로 들어온 의붓 아버지의 방만함으로 인해 번창
했던 벨 여관은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열다섯 살때 휫필드는 어려워진 여관 일을 돕기 위해 학업을 포기하기도 했지만 1년여 후
에 다시 학교에 나갔고, 17세가 되는 해에 옥스퍼드의 펨브로크 칼리지에 입학하게 됩니다. 여기서 그와 함께 18세기 대부흥을
주도했던 웨슬리를 만나게 됩니다. 연대기는 21세에 회심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그 회심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신을 헌신하겠다
는 큰 결심과 전환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이후 그의 생애는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진 것임을 우리는 그의 육필 일기들
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21세에 그는 준목이 되었고 24세 되던 해 1월 14일, 옥스퍼드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소년 시절부터 웅변의 귀재로 일컬어지던 그는 그 웅변력을 그릇으로 하여 뜨거운 영성을 셀 수도 없이 많은 영혼들에게 양식으
로 제공하여 하나님께로 인도했습니다. 그는 23세 때 이후 여러 차례 뉴잉글랜드(미국 동북부 6개주)로 건너가 선교 사역을 감당
하여 고아원을 설립하는 등 빈민 구제에도 크게 힘을 썼습니다. 그는 설교할 강단을 얻지 못하여 주로 순회 노천 설교를 했는
데, 배를 이용하거나 말을 타고 동역자들과 함께 이동했습니다. 25세가 되던 1740년 10월 20일 일기(본문656쪽)에서 읽을 수 있
듯 그는 죠나단 에드워즈를 만난 후 다음 설교지로 이동하다가 말에서 굴러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거듭되는 설교 요청에 일일이
응하다가 건강 또한 급속히 악화되기도 했습니다. 휫필드는 영국과 뉴잉들랜드를 오가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외치는 일에 피땀
을, 아니 생명을 쏟다가 보스톤으로 여행하던 중 엑세터의 여관에서 한밤중에 몰려온 청중에게 마지막으로 설교한 후 하나님의
부르심에 기쁘게 달려갔습니다. 1770년 9월 30일 주일, 향년 55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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