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트위스(William Twisse, 1578~1646)는 영국의 저명한 목사요 신학자로서, 그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의장에 임명되었던 인물이다(1643년 6월 12일).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회원이었던 로버트 베일리는, 그를 “매우 선하고, 모두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오직 학문에 열중하는” 사람으로 언급했다.
그의 일생을 간단히 살펴보자면, 그는 일찍이 1578년에 독일계인 두 부모들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후로 장성한 그는 Winchester College and New College, Oxford에서 B.A.와 M.A.를 취득했다. 그는 잉글랜드의 제임스 1 세 때인 1612 년에, 보헤미아의 엘리자베스(Elizabeth)에게 목사로 임명을 받았다. 그러나 그 직책은 오래 가지 못했고, 1613년경 하이델베르크에서 잉글랜드로 돌아 왔다. 잉글랜드로 돌아온 후에 그는 1620년부터 뉴버리 (Newbury)의 교구 목사로 봉직했다. 거기서 그는 William Laud의 대적으로서 널리 알려졌다. 그는 목사이자 대학교수로서, 목회사역과 더불어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역을 감당하였으며, 1643년에 Westminster 총회의 의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그는 이 자리를 마지못해 받아들였다고 한다. 실제로 총회 회의록을 살펴보면 “의장(트위스)은 매우 병약했고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뒤로 1645년에 트위스는 강단에서 설교 중에 쓰러졌으며, 일 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1646년 7월 20일). 그는 성대한 행렬 속에서 Westminster Abbey에 안장되었지만, 1661년에 그의 유골은 파헤쳐졌고 그의 남은 유물들은 다른 많은 의원들과 함께 성 Margaret에 있는 교회 마당에 있는 웅덩이에 안치되었다. 한편, 그의 작품으로는『그리스도인들을 여전히 구속하는 것으로서, 제 4계명의 도덕성에 대하여』와『하나님의 사랑의 부요함』그리고『은혜와 예정에 대한 다섯 가지 요점』등이 있다. 그는 칼빈주의의 타락전 선택설에 대한 강한 옹호자였는데, 1632년에『은혜의 변호』라는 저술에서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를 강하게 논박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러한 트위스의 견해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조차 소수에 속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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