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 신앙교육 다 잇슈

학교와 가정과 교회 자녀교육 Iss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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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예찬

예찬사

2025년 10월 31일 출간

ISBN 9788974395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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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신앙교육의 위기를 맞은 현실에서 학교와 가정 그리고 교회에서 자녀 신앙교육의 잇슈를 살펴보는 책이다. 이 책은 자녀 신앙교육의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어른들은 몰라요로 시작하는 12가지의 잇슈들은 신앙의 성장통 같은 보석이다. 본 도서는 자녀를 신앙으로 이끌 의무가 있는 신앙 부모들에게 재미난 에피소드를 통해 참신하고 창의적인 영감력을 제공한다. 지식 정보전달식 교육에서 신앙 형성으로, 신앙생활에서 생활신앙으로 전환시키는 확실한 안내서이다. 기독 학부모뿐만 아니라, 교회학교 교사와 신앙교육에 관심 있는 모든 분들에게 필독 도서이다. 



목차


추천의 글 1

추천의 글 2

추천의 글 3

추천의 글 4


들어가는 글 


1. 어른들은 몰라요   

2. 보물   

3. 변신 

4. 주사위 

5. 준비물 

6. 반대로 

7. 양   

8. 다양성  

9. 억울함 

10. 자연   

11. 스토리

12. 질문 



본문 펼쳐 보기


1. 어른들은 몰라요


 어릴 적 많이 듣고 부르던 동요가 있다. 

 그 가사는 이러하다.


“우리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른들은 몰라요

우리가 무엇을 갖고 싶어 하는지 어른들은 몰라요


장난감만 사주면 그만인가요

예쁜 옷만 입혀 주면 그만인가요


어른들은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

마음이 아파서 그러는 건데

어른들은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

알약이랑 물약이 소용 있나요


언제나 혼자이고 외로운 우리들을

따뜻하게 감싸 주세요 사랑해 주세요”


이 동요, 얼마나 성경적(?)인가! 우리는 신앙의 다음 세대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물론, 동요에 나오는 가사처럼 아이들에게 장난감도 필요하고 예쁜 옷도 필요하다. 그와 더불어 신앙 교육적 측면에서 교회마다 아이들에게 많은 예산을 투입하는 것도 당연히 필요하고 아이들에게 맞는 좋은 프로그램의 도입도 필요하다. 좋은 예배 공간과 신앙교육 환경 마련도 너무 필요하다. 유능한 교회학교 교사를 세우는 일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대안은 아니다. 그것을 제공하였다고 해서 노래 가사처럼 ‘그만’이라고 자부한다면 한국교회 다음 세대는 끝난 것으로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자녀들이 교회를 떠나고 신앙에 더 이상 기대지 않는 이유는 “마음이 아파서”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아프면 병원에 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것은 ‘적당히’ 아플 때 이야기이다. 도리어 사람이 “너무” 아프면 스스로 병원에 갈 힘과 의지를 상실하게 되는데 오늘날 한국교회 다음 세대가 딱 그 상황이다. 아이들 스스로 하나님을 찾고 신앙으로 나아가기 어려워져버린 상황, 많이 아픈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노래의 가사처럼 ‘알약’도 ‘물약’도 듣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아이들에게 적당한 충고나 적당한 물량 공세 따위로 회복되기는 어려워져 버렸다. 


이제 다음 세대 자녀들을 위해 ‘적당히’ 교육하는 시대는 끝내야 한다. 병원에 가서 약을 처방을 받는데 약이 듣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른 의사를 찾아가던가 듣지 않는 약과 다른 새로운 약을 써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왜 우리는 계속 같은 방식으로 같은 약만 아이들에게 들이밀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아이들은 지금 많이 아프다. 우리는 움직여야 한다. 



어린 시절 “어른들은 몰라요”


어릴 적 ‘어른들은 몰라요’ 노래를 부모님 앞에서 일부러 실컷 부르곤 했다. 절반은 신나는 노래라서, 절반은 ‘좀 들으시라고’(?) 


어린이였던 나는 무슨 생각인지 가사가 참 마음에 들었고 부모님이 듣고 아셔야겠다는 발칙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노래를 듣고 반성하여 나 좀 더 많이 놀아달라고, 왜 나와 함께 시간을 많이 안 보내 주냐고 일종의 항의 차원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 마음을 부모님도 아셨을까? 그 노래를 부를 때면 마지못해 같이 시간을 더 보내주시고 같이 놀았던 기억이 난다. 노래의 효과가 상당히 컸다. 


하지만 부작용도 있었다.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장난스레 이야기하셨다. 


“그럼 노래대로 장난감이랑 예쁜 옷은 필요 없지?”


그럼 또 분통을 내며 “아니! 그 얘기가 아니고, 장난감도 사주고 옷이랑 신발도 사줘야 해!”라며 재밌는 논쟁을 이어가고는 했다. 그런 귀여운 논쟁을 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노래의 순기능이었겠다.


아버지는 직장생활을 하시다가 조금은 뒤늦게 신학을 시작하셨고, 내가 초등학교 학생이던 시절 그때 당시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부 교역자 생활을 시작하실 때였다. 당연히 아들을 놀아줄 시간도 없었고, 더더욱 장난감 사줄 돈은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어린 나이이지만 우리 집에 돈이 없다는 것을 잘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불우한 어린 시절을 살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 행복한 가정에서 행복하게 잘 자랐다고 생각한다. (물론 친구들이 소유한 장난감이 없고, 불빛 번쩍번쩍 나오는 캐릭터 신발을 가지지 못해서 좀 불만이기는 했으나) 바쁘신데도 불구하고, 가난한데도 불구하고 행복하다고 느낀 부분은 무엇일까? 짧지만 함께하는 순간만큼은 진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어린 내 눈에 비친 내 부모가 자랑스러웠기 때문이다. 또한, 짧은 순간이어도 많은 대화를 나누었으며 소유물이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 대우받았기 때문이었다. 사랑을 느꼈고 부족함 가운데에서도 최선의 사랑을 주고자 했던 부모의 마음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행복한 어린 시절의 밑거름이 되었다.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잘 전달되는가이다)오늘날 교회가 다음 세대를 향해 파고들어야 할 지점이 이곳이다. 많은 교회들이 사역으로 가득하여 바쁘다. 교역자도 바쁘다. 바빠도 너무 바쁘다. 재정적으로 어려운 교회도 있다. 아이들에게 작은 선물 하나 건네 주기 힘든 교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자녀들은 그보다도 먼저 필요한 것이 있다. 부모 세대의 (신앙적)관심, 부모 세대의 (신앙적)이해, 부모 세대의 (신앙적)사랑을 원한다. 문제는 그 사실을 어른들만 모른다.


과거 한국교회 교회학교는 간식과 재미난 프로그램으로 전도하고 부흥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다. 먹는 것이 너무나 귀하던 시절에 세상은 마음껏 줄 수 없는 간식이라는 사랑의 표현으로 아이들에게 전달되었던 것이고, 산업화 시대에 아이들을 놀아주지 않던 어른들과 달리 재미난 프로그램을 함께 뒹굴며 사랑했기에 아이들이 반응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다음 세대는 부모 세대를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케 된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다음 세대에게 예수님으로 찾아가야 한다.



성경 속 “어른들은 몰라요”


재밌게도 성경 속에도 “어른들은 몰라요”가 등장한다. 유년 시절의 예수님께서 엄마 마리아와 아빠 요셉에게 “어른들은 몰라요!”를 외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눅 2:49-50).


유월절에 12살의 예수님과 그 부모가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그날들을 마치고 돌아가게 되는데 예수님은 홀로 남아 예루살렘에 머무시게 된다. 그런데 아이를 챙겨야 하는 부모가 예수님을 챙기지 않고 그냥 길을 떠나버린다. 그리고는 한 시간도 아니고 자그마치 하룻길을 간 후에야 아이가 사라졌음을 깨닫게 된다. (어찌 보면 참 담대한 부모다. 지금 아이를 키우는 아빠의 입장에서 핸드폰도 없이 하루 동안 내 아이가 안 보이는데 그러려니 갈 길을 가는 부모라니...) 


이 모습을 보고자 하니 오늘날 한국교회 교회학교와 오버랩되는 듯하다. 아이는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고 있는데, 그곳에 남아 궁금증을 더 해결하고 아이만의 신앙 숙제를 하고 있는데 부모는 저 멀리로 떠나버리는 상황이다. 아이의 상황과 눈높이는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의 신앙 활동이 끝났다고 아이는 버려두고 자기들끼리 일상으로 복귀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신앙교육도 이와 비슷한 양상을 띤다. 아이의 심리상황과 세대 특징과 개인의 특성들을 고려하지 않은 채 어른들끼리 재빨리 신앙교육을 ‘해치우고’ 싶어 한다. 여러 교회들의 부모들이 대 예배가 끝나면(사실 대 예배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대 예배가 어디 있고, 소 예배가 어디 있나? 어른들의 예배는 대 예배, 아이들의 예배는 작은 예배인가?) 아이들 공과 공부도 끝나지 않았는데 부서실에 쳐들어와서 아이들을 데려가는 경우를 많이 목격했다. 고작 일주일에 겨우 한 시간을 신앙교육 하는데(예배까지 교육 시간으로 후하게 포함해줘서... 교육 시간이 아니라, 올려드리는 예배 시간으로 따지면 일주일에 많아야 20분 밖에 없다.) 그마저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데려가지 않더라도 문 앞에 서서 빨리 끝나길 재촉하는 것은 양반이다. 


아이들의 주일예배와 공과는 어른 예배와 상관없이 ‘다’ 끝날 때까지 충분히 주어져야 한다. 학교에서는 절대 이런 일이 없지 않은가? 학교에서 부모가 자기 스케쥴로 인해 수업 도중에 교실에 와서 아이를 데려가지는 않는다. 왜 교회가 학교보다 못해야 하는가. 아이들은 그 순간을 경험하면서 신앙은 언제든 뒷전이 되어도 상관없는 존재로 여기게 된다.


때로는 내 아이가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 신앙적 갈증이나 부담감을 해소하는 동안 적당히 탁아를 해두고 그 짧은 시간 안에 적당한 신앙생활 적응자를 만들고 싶은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 


부서 안에서는 어떠한가? 교육활동을 제대로 따라오지 않는 아이들을 향해 왜 따라오지 않냐며 다그치기도 하고, 요즘 아이들은 어른 말을 안 듣는 다음 세대라 칭해버리고 만다.간혹 어른들을 잘 따라와서 어른의 발걸음 박자에 잘 맞추고 있는 아이들을 향해서는 “잘하고 있다”고 말하며, 그 아이들의 신앙을 치켜세워 준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춤을 보고 싶어서 억지로 칭찬하는 것은 아닌가. 


과연 어른의 박자에 소리 없이 따라가는 아이들이 잘하고 있는 것일까? 아무 말 없이 교회에 잘 출석하고 그럭저럭 교회에 적응하는 아이들이 바른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그럭저럭 잘하던 아이가 왜 중고등학생이 되면 갑자기 교회를 떠나버리는가? 그것이 단지 질풍노도의 시기에 급작스러운 심리변화는 아니다. 


만약 어른의 요구에, 어른의 신앙생활 방식에 그대로 잘 따라오는 것이 신앙인 합격이라면, 그것이 기준이라면 아까 읽었던 본문에서 예수님은 낙제점을 받는 어린이가 된다. 


그래도 본문에서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참 다행인 구절이 있다. 45절의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이다. 


부모가 조금은 늦었지만 아이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자각했다. 그러면 부모의 다음 행동은 무엇이어야만 하는가? “찾으면서 돌아가는 것”이다. 아이가 없어졌는데도 그냥 계속 갈 길을 가는 부모는 부모가 아니다. 아이를 찾기 위해, 왔던 길을 되짚으며 아이를 찾아내야 한다. 아이를 찾는 방법은 처음 지점으로 되돌아가 아이가 머무르고 있는 곳을 향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모습은 어떠한가? 아이를 (신앙적으로) 잃어버렸다는 것은 자각했으나, 황당하게도 찾지도 않을뿐더러, 충격적이게도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앙을 가진 부모임에도 아이가 신앙을 잃어버렸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었으며 방황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신앙을 되찾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에 가장 큰 문제가 있다.


‘언젠가는 다시 신앙을 회복하겠지’

‘교회에서 전도사님, 목사님이 뭐라도 해 주겠지’

‘나중에 질풍노도의 시기가 끝나면 돌아오지 않을까’


아이를 잃어버려놓고 알아서 따라오겠지 생각하며 부모도, 교회 신앙공동체도 찾지 않고 그냥 계속 갈 길을 걸어간다. 


찾으며 돌아가야 한다. 대학입시든 바쁜 일상이든 사역이든 일단 다 제쳐놓고 아이의 신앙회복을 위해 부모와 교회는 찾으며 돌아가야 한다. (교역자로서 때로는 다수를 챙기느라, 사역을 진행하느라 이 점에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적이 생각나 많이 부끄럽다.)


무엇이 방법인지, 아이를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는 아이마다 다르다. 어디에 숨어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찾고자 하면 찾을 수 있다.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그러한 애타는 마음, 간절한 마음, 사랑으로 되찾아주고자 하는 마음은 반드시 아이에게 전달될 것이며 부모와 아이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반드시 다시 찾아 만나게 될 것이다. 찾으러 떠나라. 그것이 기독교인 부모로서 제1의 사명이다.


읽었던 말씀의 46절을 보면 조금은 두려운 내용(?)이 등장한다. 분명 하룻길을 갔는데, 만나는 데에는 사흘이 걸렸다. 멀어진 시간보다 찾는 시간이 더 많이 걸린다는 뜻이다. 


이틀 길을 갔다면 일주일이 걸렸을지도 모른다. 사흘을 갔다면...!? 이 내용은 두 가지를 시사한다. 하루라도 빨리 자녀의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 모든 것을 던지라는 것이다. 늦어지는 만큼 더 먼 길을 가야 한다. 또 한 가지는 애초에 헤어지지 않으면 편하다는 것이다. 아이의 신앙과 부모의 신앙이 멀어지지 않도록 아이를 평소에 사랑하며 가정 안에서 신앙교육을 철저히 하며 아이를 이해하고 대화하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 아이를 잃어버리지 않고 처음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더 머물렀다면 그 사흘 길은 고난의 시간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의 행복한 휴가가 되었으리라. 


46절의 후반부를 보면 예수님이 랍비들과 함께 앉아서 그들에게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47절에는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긴다. 우리는 이것을 보면서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물론 없지는 않겠지만 과연 이 본문이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내기 위함일까? 기록된 목적이 과연 신적인 모습을 나타내고자 적었을까? 진짜 신적인 능력을 보여주고자 했다면 굳이 이런 장면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간 부모에게 텔레파시로 연락하여 돌아오게 하던가, 구름을 타고 예루살렘을 빠져나가는 장면을 만드시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그런 동화적인 장면이 아닐지라도, “어린 예수님은 랍비들과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모든 것을 통달하고 있었더라”라는 한 구절을 넣는 것이 더 신적으로 보일 것이다. 아무리 예수님이셔도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장면이 그려지는 것은 어린이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보아야 한다. 

늘 어른의 시각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아이를 부족한 존재, 하찮은 존재, 신앙적으로 미완의 존재로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라는 것이다. 


아이들은 있는 모습 그 자체로 하나님의 형상이다. 미완의 형상이었는데 어른이 되며 완성이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처음 시작부터 하나님의 형상이다. 아이들은 충분히 성경적 사고를 할 수 있으며, 어른을 능가하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가질 수 있는 존재다. 어른의 생각과 형식과 스타일로 아이들을 가두지 말아야 함을 보여 주신다. 


많은 신앙교육의 형태들이 성경 암기, 암송, 반복, 필사 등으로 이어질 때가 많다. 물론 그것들만의 힘이 있다. 해야 할 때도 있고 귀한 전통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 아이들의 무궁무진한 하나님 만남의 장을 축소 시키지 말아야 한다. 더 많은 다양한 상상력을 자극시키며, 대화를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도록 하며, 다양한 방식의 활동과 접근을 해야 한다. 


아이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느끼는 것은 “아이들은 우주다”라는 사실이다. 늘 바라보는 어른의 기대보다 큰 것을 가지고 있다. 생각보다 넓은 하나님과의 접촉점을 가지고 있다. 좁은 것은 어른이지 결코 아이가 아니다. 어른은 그만 이야기하고 아이들이 이야기하게 하며, 펼치게 하는 것이 좋은 교육이다. 


48절을 보면 아주 재밌는 이야기가 나온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마리아가 한 말이다. 왜 안 따라오고 부모를 근심하게 했냐는 것이다. 이것은 철저히 부모의 시각, 어른의 시각이다. 아이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이 말은 부모가 아닌, 어린이 예수님이 하셔야 하는 말이다.


“부모님, 어찌하여 저에게 이렇게 하셨습니까?”라고 해야 하지 않는가? 


부모가 되어서 아이를 내팽개치고 자기들끼리 길을 떠나놓고 아이 탓을 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닮아있다. 어느 날 갑자기 신앙에서 멀어진 자녀에게 우리는 묻는다. 


“너 안 그러더니 이제 와서 왜 그래?”


이 질문은 아이가 던져야 할 질문입니다. 


“부모님, 어찌하여 저에게 이렇게 하셨습니까? 왜 이제 와서 찾으려 하십니까?”


같은 실수를 하는 우리가 되지 말아야 한다. 떨어지지 않고 함께하며 나아가는 책임은 아이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 있다. 부모의 책임을 아이에게 전가하지 않길 소망한다. 또 나아가 하나님께 따지며 “왜 내 아이의 신앙을 붙들어주지 않으셨습니까!”라고 외치지 않길 바란다. 하나님이 이렇게 이야기하실지도 모른다. “네가 먼저 떠나놓고 왜 나보고 그래?” 


그래도 이 본문의 이야기가 해피엔딩이어서 참 다행이다. 마리아와 요셉은 어린 예수님의 행동과 신앙을 끝까지 100퍼센트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이를 다시 만났다는 것이고, 그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랬기에 그들은 다시 한 가족이 되어 나사렛으로 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이를 다 이해하지는 못했을지라도 51절에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라는 말씀처럼 마음에 두고 그 아이를 다시는 놓치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아이를 신앙으로 양육했다는 것이다. 


“어른들은 몰라요”라고 외쳤던 예수님의 말에 여전히 어린이 예수님을 다 모르기는 하지만 찾아, 돌아가고, 만나고, 들어주고, 이해하기에 힘쓰며, 마음에 둔 그 부모는 부모로서 합격이었다. 그 결과가 52절에 나온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부모 미션


1) 아이와 함께 “어른들은 몰라요” 노래를 듣고 불러보고 아이의 소감을 들어보자.


2) 아이에게 어릴 적 부모님 덕분에 가장 행복했던 경험을 들려주자.


3) 하루 정도는 시간을 내어 부모와 아이 역할을 바꾸어 어린이가 되어 보자.


4) 아이와 성경을 펴고 누가복음 2장 41~52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이왕이면 아이들이 읽기 편한 쉬운 성경, 혹은 새 번역 성경을 읽으라. 그리고 아이에게 예수님 입장에서 예수님이 왜 그 행동을 하셨을지 이야기를 들어 보자.


5)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어린이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했을지 뻔하지 않은 ‘발칙한 상상’을 해보자. 말하기를 좋아하는 아이라면 말로,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아이라면 그림으로 표현하도록 해도 좋다. (ex: 예수님은 친구들이랑 어떤 장난을 쳤을지, 공부하기 싫어서 떼쓰지는 않았을지 등)



기도문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천하보다 귀한 사랑하는 자녀를 허락하시고

맡겨주심에 감사합니다. 

늘 부족하여서 제 아이임에도 제 자녀를 잘 알지 못함을 고백합니다. 


아이의 마음을 때로는 상하게도 하고, 내 욕심에 아이를 다그치기도 하

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양육을 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기독교적 양육을 감당할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아이의 신앙과 관련하여 방관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마음을

허락하옵소서. 

아이의 모습을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시옵소서.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길 원합니다. 

아이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마음에 두길 원합니다. 

양육하는 그 귀한 시간 속에 주님께서 늘 동행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 보물


코로나 시절 줌으로 온라인 수업을 한창 진행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아이들이 각자 집에서 수업을 하니 집에 있는 물건을 찾아오라 하여 그 물건을 종종 수업자료로 사용하고는 했다. 한 번은 아이들에게 집에 있는 물건 중 각자에게 가장 소중한 ‘보물’을 화면에 비춰 보라고 했다.


어떤 아이는 최신형 스마트폰을 화면에 비췄고, 게임을 좋아하는 아이는 플레이스테이션, 닌텐도를 비추기도 했다. 여자아이들은 좋아하는 아이돌의 사진이나 굿즈를 비추기도 하였고 상당수 아이들 은 자기가 모아온 용돈 다발을 화면에 비추었다. 


그런데 그중에 어떤 한 아이가 평범에 보이는, 아니 많이 낡아 보이는 줄이 달린 이어폰을 화면에 비추었다. 


‘오 나름 참신한데?’라고 생각하며 물었다. 


“음악을 좋아해서 음악이 너의 보물이라고 생각한 거구나!?” 


그런데 돌아오는 아이의 대답은 의외였다. 


“저를 너무 아껴주고 사랑해 주었던 삼촌이 최근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요. 이 이어폰은 그 삼촌이 매일 음악을 들을 때 쓰시던 거예요. 삼촌이랑 저랑 여기저기 다니며 함께 한 쪽씩 나눠서 노래를 듣고는 했어요. 이 이어폰은 제가 평생 간직하며 쓸 거예요.”


아이의 대답을 듣고 머리를 한 대 ‘텅!’하고 맞은 것 같았다. 이 아이에게 최신형, 최첨단, 초고가의 이어폰이 주어지더라도 이 이어폰은 대체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이어폰은 이제 이어폰이 아니라, 삼촌에 대한 추억, 삼촌 그 자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줌에서 20명가량의 동급생 아이들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순간 숙연해졌다. 모두 어느새 그 한 아이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경청하고 있었다. 그리고 누구 하나라도 그 이어폰이 별로라고 하거나 보물이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았다. 내 이어폰이 더 최신형이라고 자랑하지 않았다.


그 이어폰을 소개했던 아이는 잠시 삼촌 생각에 센치해졌었지만, 다시 자신의 귀에 이어폰을 끼우고는 화면에서 밝은 얼굴로 춤을 추며 놀기 시작했다. 큰 슬픔을 겪었었지만 아이는 여전히 삼촌과 함께하고 있었다. 


이어폰은 슬픈 기억이 담겨있기도 하지만 엄청난 보물이었고 그래도 기억하도록 하는 특별한 매개체였다.



성경 속 “보물”


성경에 등장하는 최고의 보물은 무엇일까? 또 여러분의 보물은 무엇인가? 만약 하나님께서 오늘 ‘온라인 줌 모임’에 접속하셔서 여러분에게 아까 수업처럼 똑같이 명령하신다면 어떨 것 같은가? 


“너의 삶 속에서 최고의 보물이라 생각하는 단 하나를 선택하여 화면에 비추라!”라고 한다면 무엇을 비추어야 할까?


여러 많은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돈을 비추고, 나의 가진 소유를 비추고, 내 가족들을 비추고, 내가 일구어온 커리어를 비추지 않을까 싶다. 나름 신앙인이라 입술로는 아니라고 말은 하지만, 조금은 가식적(?)으로 성경을 꺼내어 비춰야 하겠지..? 라고 생각하지만 우리 마음의 진심은 세상의 ‘그것’들이 내 보물이라고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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