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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성경의 가장 난해 구절에 대한 기독교와 유대교의 해석을 상세히 비교 설명하며 구약성경이라는 한 뿌리에서 나온 두 종교 사이의 상호 이해와 대화를 증진하고자 한다. 유대교에 대한 이해에 관심이 있는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의 텍스트가 원래 상황에서 원래 독자에게 무엇을 의미했으며 그것이 기독교에서 어떻게 예수와 관련하여 새로운 의미로 이해되었는지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주지하다시피 기독교는 유대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예수와 사도들 및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유대교와 기독교 모두 구약성경의 하나님을 믿고 아브라함을 민족적 조상 또는 믿음의 조상으로 여기며 구약성경을 자신들의 경전으로 삼고 있고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에 있던 제 2성전에서 모였었다. 이런 점에 비춰보면 기독교와 유대교 사이에는 그 종교들과 다른 종교들 사이보다 공통점이 많으며, 따라서 양자 간에 서로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는 토대가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두 종교 사이에는 서로 반목하고 박해한 아픈 역사가 있다. 처음에는 유대교가 태동 중인 기독교를 박해했으며, 로마 제곡 때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끝나고 이어서 테오도시우스 1세 때 기독교가 공식으로 국교가 된 뒤에는 오히려 기독교가 유대교를 박해했으며, 현재까지도 두 종교 사이의 상호이해와 대화는 여전히 요원한 상태다.
이러한 현실에서 수용사를 연구하는 유대인 출신 구약 성서학자인 브레틀러와 신약 성서학자인 레빈이 팀을 이루어 이스라엘의 경전으로부터 신약성경에 중요한, 잘 알려진 10개의 구절 또는 주제들을 선택하여 그것들을 심층적으로 조사한다. 이 책의 중심적인 장들 각각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질문을 한다. 그 텍스트가 고대 이스라엘의 원래 맥락에서 무엇을 의미했는가? 신약성경 저자들은 그 텍스트를 어떻게 해석하는가? 예수 시대(예컨대 사해 두루마리, 1세기 역사가 요세푸스, 1세기 철학자 필론)부터 랍비 전통과 중세 전통까지의 성경 시대 이후의 유대인들과 후대의 기독교 전통은 그런 동일한 텍스트들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브레틀러와 레빈은 어떻게 한 가지 해석이 옳고 다른 해석이 그른지 보여주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어떻게 이런 해석들이 발달했는지, 성경의 저자들과 원래 청중들의 신학적 전제들에 비추어볼 때 그런 해석들이 어떻게 일리가 있는지, 그것들이 어떻게 필연적으로 부분적인지를 보여주려고 한다. 그들은 또한 어떻게 번역이 문제가 되는지도 보여주고자 한다. 번역자들은 때로는 의도적으로 자기 공동체의 필요에 부합하는 해석을 선택하며, 종종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한다. 저자들은 또한 유대교와 기독교의 몇몇 해석의 변증적 함의를 인정하면서 각각의 텍스트나 주제에 대해 “역사와 신학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비추어 또한 다른 전통들에 대한 우리의 헌신과 존중에 비추어 우리가 그것들에 관해 뭐라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며 이 접근법을 통해 변증이 가능성으로 변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한다.
저자들은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이 공유하는 텍스트들을 다르게 읽고 서로에게 배울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우리는 모두 상대편의 전통에 독특한 텍스트들도 읽을 수 있고, 또한 읽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유대인들은 신약성경을 읽고 그것에 대한 견해를 그리스도인들과 나누는 것이 좋고 그리스도인들도 성경에 수록되지 않은 유대교 자료들을 읽고 그것들에 대한 견해를 유대인들과 공유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우리가 마침내 성경의 내용이 무엇이든 성경을 제로섬 문제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변증에 기초한 이전의 몇몇 해석을 수정하고 완전한 합의는 아닐지라도 상호 존중의 가능성에 기초하여 좀 더 새로운 해석을 만들어낼 수 있는 지점에 와 있다고 주장한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특정한 성경 구절, 특히 난해한 성경 구절이 하나의 의미로만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처한 상황과 자신의 전제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해석도 그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일리가 있을 수 있음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인이 구약성경의 특정한 구절들에서 예수를 읽어 내지 않고 그 구절들을 기독교와 다르게 해석하는 유대인들에게 동의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그들이 왜 그렇게 해석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때로는 그들의 해석을 통해 해당 구절들의 원래 의미와 기독교의 해석과는 다른 좀 더 넓은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둠으로써 그 구절들에 대해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본서는 유대교와의 종교 간 대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과 천지창조, 아담과 하와, 동해복수법 같은 여러 난해한 구절들을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하기 원하는 기독교인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서론
번역과 약어에 관한 주석
1장 성경들과 성경 해석자들에 관해
2장 예언의 문제와 약속
3장 세상의 창조
4장 아담과 하와
5장 “너는 영원히 제사장이라”
6장 “눈은 눈으로”와 “다른 뺨도 돌려대라”
7장 “내 피를 마시라”: 제사와 속죄
8장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으리라”
9장 이사야서의 고난받는 종
10장 요나의 표적
11장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12장 인자
13장 결론: 변증에서 가능성으로
감사의 글
주요 텍스트 색인
샤갈의 그림의 다양한 해석은 이 책의 의도를 강조한다. 이 책의 원제는 『예수가 있는 성경 또는 예수가 없는 성경』(The Bible With or WIihout Jesus)이 아니라 『예수가 있는 성경과 예수가 없는 성경』(The Bible With and Without Jesus)이다. 이 제목은 우리가 똑같이 관심을 가지는 “성경”, “예수가 있는”, “예수가 없는”이라는 세 가지 주제를 제공한다. 우리는 창세기나 히브리 성경, 타나크(Tanakh), 구약성경으로 다양하게 불리는 것에 수록된 다른 어떤 텍스트를 읽을 때 한 가지 방법만 옳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가 텍스트에 가져오는 질문들은 여러 대답을 낳을 텐데, 때로는 서로 배타적이고 때로는 보완적이고 심지어 서로를 강화하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이 텍스트가 원래의 맥락에서—창세기 저자가 그 이야기를 썼을 때—무엇을 의미했는가?”라는 질문만 하지 않는다. 우리는 또한 “창세기 18장이 기독교의 맥락에서—예수가 있는 해석—무엇을 의미하는가?”라고만 묻지도 않는다. 우리는 성경이 기록된 후 유대교의 맥락에서 이 고대 경전(scripture)의 다양한 해석—예수가 없는 해석—에만 초점을 맞추지도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이 다양한 해석들이 대화하게 만들려고 한다. 그런 대화는 우리가 같은 텍스트를 읽거나 같은 그림을 볼 때 왜 그런 다른 견해들을 가지게 되는지 이해하도록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 이웃의 관점을 더 잘 이해할수록 우리는 더 좋은 이웃이 될 수 있다. 원래 텍스트의 역사적 배경을 되도록 가장 잘 결정하여 그 배경을 잘 알수록 우리는 고대의 청중이 그 텍스트를 처음 들었을 때 그것을 어떻게 해석했을 수도 있는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성경 텍스트들을 해석한 사람들의 역사적 맥락을 더 많이 알수록 우리는 우리의 종교 전통과 우리 이웃들의 종교 전통들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_서론
3장에서 12장까지로 구성된 우리의 핵심적인 장 각각은 특정한 텍스트나 주제를 다루며 같은 구조를 지닌다. 대체로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인용하는 구절로 시작하고 이어서 뒤로 돌아가 그 인용구를 그것의 원래의 맥락에서 검토한다. 우리는 히브리어 단어들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그것은 종종 문제가 된다)뿐만 아니라 그 원래의 텍스트가 언제 어떻게 쓰였는지도 결정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이어서 우리는 그 구절들이 70인역(히브리어 텍스트의 그리스어 번역본)과 사해 두루마리(사해 근처에서 발견되었고 기원전 4-3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까지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성경 텍스트와 성경이 아닌 텍스트들의 두루마리들과 파편들) 같은 신약성경 이전 및 동시대의 유대교 자료들에서 어떤 의미였는지를 살펴본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신약성경이 유대교의 성찰에서 어떻게 해석을 끌어오고 어디에서 다른 해석을 제시하는지 보여준다. 다음 단계로는 후대의 선택된 유대교 텍스트들을 살펴볼 것이다. 그중 일부는 신약성경의 해석과 관련을 맺는데 대체로 신약성경에 호의적이지 않다. 몇몇 경우에 우리는 그 텍스트들이 초기 그리스도인, 즉 신약성경 후 전통에서 어떻게 해석되었는지 살펴본다. 우리는 각 장을 유대인과 그리스도인 그리고 실로 모든 독자가 이 고대의 구절들에서 오늘날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검토함으로써 마무리한다. 우리는 기원전 첫 번째 천년기 초부터 기원후 1세기와 21세기까지 연대기적으로 넓은 범위를 포괄한다.
그리스 정교회 같은 동방 예전 교회들은 오늘날까지 히브리 성경이 아니라 70인역을 정경으로 여긴다.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공동체들은 기독교의 주장과 싸우기 위해 히브리 성경에 좀 더 가까운 새로운 그리스어 번역본을 만들었다. 후에 유대인들은 예전 목적상 그들의 신성한 텍스트들은 원래의 히브리어(아람어)로 남아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에 반해 기독교 교회들은 예배 때 다양한 자국어 번역본을 사용한다.
우리의 견해로는 성경 이야기(story)는 여러 세기에 걸쳐 이야기(tale)들로 직조한 여러 직공에 의해 만들어진 놀라운 장식용 직물이다. 이 직공들 각자는 역사, 하나님과 언약 공동체 사이의 관계, 그 공동체에 소속된 사람들이 어떻게 믿고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해 다르게 이해했다. 우리는 그러한 다양한 관점을 조화시키려고 하기보다는 그 관점들을 치하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다른 해석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하기보다 그것들을 치하한다. 주류 성경학자들로서 우리는 우리의 해석 작업에서 두 견해를 모두 존중하며 텍스트들의 해석은 복잡한 과정임을 인식한다.
_1장 성경들과 성경 해석자들에 관해
고대 이스라엘과 제2성전기 유대교(제2성전은 기원전 515년경에 세워졌고 기원후 70년에 로마인들에게 파괴되었다)에서 예언이 어떻게 이해되었는지에 대한 지식은 이스라엘의 경전들에 대한 유대교의 해석과 기독교의 해석 모두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배경 역할을 한다. 몇몇 사람이 예언으로 읽은 것을 다른 사람들은 예언으로 읽지 않았다. 몇몇 사람이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본 것을 다른 사람들은 그릇된 주장이거나 불완전한 성취로 보았다. 다양한 집단이 같은 텍스트—성경 텍스트 및 기타 텍스트—를 그들의 다양한 출발점에 기초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읽어 그에 따른 그들의 논리적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 대한 이해의 관점에서 서로 반드시 동의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두 세트의 해석 모두에 담겨 있는 논리를 알 수 있어야 한다. 이 논리에 대한 지식은 우리가 상호 경멸이 아니라 상호 존중을 개발하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
기독교는 유대교의 관습과 믿음에서 출현했고, 랍비 유대교는 곳곳에서 기독교의 주장들과 경쟁하면서 형태를 갖췄다. 자신을 정의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와 유대교 양측은 서로를 향한 변증을 전개했다. 이 변증들은 특히 기독교 측에서 자신을 정의할 필요가 매우 컸던 기독교 출현 시기와 유대인들이 개종하라는 그리스도인들의 압력에 저항했던 중세의 두 시기 동안에 다듬어졌다.
우리는 소셜 미디어에서 어느 때보다 변증이 많이 넘쳐나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다른 이들의 믿음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우리 자신의 믿음을 긍정할 수 있는 가능성의 세상에서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타인에 대한 이해는 좋은 일일 뿐만 아니라 시민 사회와 종교적 헌신을 위해 필요하기도 하다는 것이 이 책의 전제다. 이 책의 독자들은 특정한 관점—성경 텍스트가 처음에 무엇을 의미했는지, 유대교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기독교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탐구—에 어느 정도 공감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모든 독자에게 좀 더 포용력을 갖추도록 요청한다. 우리는 우리가 개인적으로 적실성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우리의 성미에 맞는 내용만 읽는 것 이상을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텍스트들과 다른 이들의 믿음들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다. 이는 우리가 다문화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면 우리 자신을 더 잘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체주의 신학(supersessionism/replacement theology)으로 알려진 변증적 입장에 관해 논의하는 경우(5장) 외에는 변증을 피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우리는 이방인 교회가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의 상속자로서의 이스라엘인들을 대체한다고 주장하는 이 신학이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 해롭다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 경우를 제외하고는 역사적·비평적 관점에서 유대교의 입장과 기독교의 입장에 대해 똑같이 공감하면서 그것들을 똑같이 명확하게 제시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_2장 예언의 문제와 약속
기독교 운동이 시작되기 전에는 아무도 창세기나 이스라엘의 경전들의 다른 곳에서 삼위일체를 발견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독교가 발흥하기 전의 유대교 텍스트들은 창조의 시작에서 다른 인물들을 찾아내며, 랍비 유대교도 문제의 그 “우리가 ~하자”에 대한 자기들의 다양한 해석을 제공한다. 창세기 1장에 대한 해석에서 우리는 예수를 주님으로 예배했던 유대인들을 포함하여 유대인들이 그들의 경전을 이해한 방식에서 연속성과 차이점 모두를 발견한다.
“창세기 1:26의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가 제기하는 질문에 의존한다. 성경의 원래 의미 또는 초기 의미에 관심이 있는 역사비평가들은 “우리”에서 신적 어전회의를 보고 하나님이 천상의 무리와 협의하는 것으로 여긴다. 몇몇 유대인은 하나님이 토라와 상의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스도인들은 대개 마르틴 루터의 주석에 반영된 것과 같이 삼위일체를 본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루터의 아이디어들의 강력한 변증적 요소 없이 그 아이디어들을 재생산하겠지만 말이다.
_3장 세상의 창조
에덴 이야기는 현상(things)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관한 신화다. 그러나 그것은 현상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규범이 아니다. 대신 그것은 우리에게 현상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필요한 질문을 하도록 자극한다. 첫째,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와 땅과 동식물 사이의 관계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요구한다. 그것은 우리가 모두 땅에서 난 피조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땅과 자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땅으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땅을 돌볼 것인가? 둘째, 비록 창세기는 하나님이 땅을 저주한 것으로 묘사하지만, 우리는 기계나 살충제 또는 유전 공학을 사용해서 그 저주를 걷어내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우리가 땅에 대한 저주와 싸울 수 있다면 창세기 3장에서 여성이 종속적인 존재라거나 여성이 출산 중에 고통이나 추가적인 수고를 경험해야 한다는 주장을 도출할 이유가 없다. 셋째, 창조 내러티브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상반된 이해로 이어졌다. 우리는 천사보다 조금만 낮고 자유의지가 주어진 존재인가, 아니면 우리는 잉태한 순간부터 타락했고 영원한 벌을 받을만한 존재인가? 우리는 원죄를 강조하는가, 아니면 원래의 기회를 강조하는가? 창세기 2-3장은 우리에게 불멸성에 관해 생각하도록 요청한다. 흙으로 돌아갈 운명에 직면해서 우리는 어떻게 각각의 순간을 가치가 있게 만드는가? 우리의 자녀나 우리 손의 일들이나 우리의 사상의 기여가 불멸성에 대한 대체물인가? 아니면 우리는 신화적인 과거에 필적하는 신화적인 미래에 불멸의 영혼을 필요로 하는가? 에덴이 우리의 진정한 고향이고 우리는 항상 유배 상태에 살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가 [이 땅에서] 고향으로 삼는 곳이 우리의 진정한 고향인가?
이처럼 다양한 견해는 성경의 힘을 약화시키며 차이들이 어떻게 해서든 조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성경에 힘을 주는 요소는 바로 성경의 다양한 음성, 즉 다양하고 때로는 상충하는 견해를 제공하는 데 대한 성경의 관심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미 성경의 처음 몇 장들에서부터 야웨 자료(J)와 제사장 자료(P)에 수록된 두 개의 창조 이야기를 통해 이러한 다양한 관점을 본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텍스트들에 관한 질문이 새로운 선택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질문을 하는 것이 위험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텍스트가 이런 질문들과 다른 질문들을 하도록 격려하는데, 우리는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통해 우리 자신과 이 세상에서 우리의 위치를 발견한다
_4장 아담과 하와
히브리서는 이스라엘의 많은 텍스트—시편 18회, 오경 14회, 예언서 7회의 언급을 포함한다—를 재해석하면서 이 텍스트들을 이해하고, 그것들의 의미를 그림자 밖으로 꺼내오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가 제공하는 렌즈를 통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히브리서는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히 1:5; 5:5. 행 13:33에 인용된 시 2:7을 인용하고 삼하 7:14을 인유한다[allude])와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히 2:12. 자주 인용되는 시 22편, 여기서는 22:22을 인용한다)처럼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 발견되는 구절들을 반복함과 아울러, 예수를 이스라엘의 경전들에서 제사장이자 왕인 멜기세덱이 등장하는 유일한 장들—시편 110편과 창세기 14장—과 연결함으로써 그의 제사장 역할을 강조한다. 수수께끼 같은 이 두 텍스트는 유대교와 기독교가 갈라질 때 논쟁이 되는 곳들이다.
그런 모호한 점들에도 불구하고 그 절들은 창세기에서 이미 여러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첫째, 살렘과 예루살렘 사이의 함축된 연결 관계는 최초의 히브리인인 아브람을 유다의 수도 및 그것의 성전과 관련시킨다. 멜기세덱이 아브람을 축복한 것에 대한 언급은 어근 b-r-ch(“축복하다”)를 다섯 번 사용하는 창세기 12:2-3에 소개된 주제로 확장된다. 그 어근은 창세기 14:19-20에서 세 번 사용된다. 아브람은 이처럼 하나님 및 중요한 인간 제사장-왕에게 축복을 받는다. 그 절들은 십일조 제도도 강화한다. 그리고 그 절들은 고대 가나안의 신인 엘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민족 신인 야웨에 의해 흡수되었는지도 보여준다.28 그러나 히브리서의 저자와 훗날의 유대교 저자들에게 번역과 해석상의 문제가 있는 그 장은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그들은 그 장에서 예언적인 함의와 변증적인 논거들을 발견했다.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 모두 끝나지 않은 시스템들에 참여한다. 그들 모두 방식은 다르지만 속죄와 제사, 죄와 회개의 중요성을 인식한다. 어느 시스템이 다른 시스템을 “대체”한다거나 어느 것이 “더 나은” 경로라고 주장할 이유가 없다. 두 시스템 모두 자신의 논리를 지니고 있으며, 모든 사람이 두 시스템이 각각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인식하면 좋을 것이다.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 모두 창세기 14장과 시편 110편을 그럴듯하게 해석하고 있으며,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경전들이 해석을 요구한다는데 동의할 수 있다.
_5장 “너는 영원히 제사장이라”
“눈은 눈으로”뿐만 아니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 맹세하지 말라” 같은 계명들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에 관한 지침을 제공하면서 예수는 유대인들이 항상 해왔던 두 가지를 하고 있다. (1) 텍스트 해석하기. 이는 우리가 1장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성경 텍스트는 언제나 해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2) 토라가 그들 자신의 삶과 그들의 공동체의 삶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예수가 여기서 다루는 문제들은 유대인이나 유대교에 독특한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인 문제다. 모든 사람이 폭력과 성적 부정에 대응하기와 개인의 정직성, 원수들을 다루기에 관한 문제들을 갖고 있다. 모든 문화가 대응들을 제안하거나 명령하는 법적, 문화적, 가족적, 종교적 규범 등 다양한 규범을 갖고 있다. 그런 규범들은 좀처럼 모든 상황을 다룰 만큼 충분히 광범위하거나 명확하지 않다. 그런 규범들이 정적인 상태로 유지되는 것도 아니다. 상황이 변하면 필연적으로 규범도 변한다. 예수는 그의 이전과 이후의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대의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토라를 해석한다. 사실 마태에게 있어 예수는 새로운 모세와 같이 산에 오르는 탁월한 해석자다. 그의 해석은 한 토라를 다른 토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그는 토라를 폐지한다기보다 확장한다. 그는 율법을 덜 엄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엄격하게 만든다. 그는 토라를 버리는 대신 어떻게 해야 토라가 가장 잘 이해되고 실천될 수 있을지를 결정하려고 한다.
예수의 언급들은 대조로서 발설된 것이 아니며, 그가 이스라엘의 경전들을 거부하고 새로운 법을 만드는 것도 아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그가 진술하는 바와 같이 그는 토라를 폐기하러 오지 않았다. “눈은 눈으로”가 사법적 명령이 아니라 법적 원칙이라고 주장하는 랍비들이 토라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듯이 예수도 토라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눈은 눈으로”의 경우 그는 신체적 상해에서 수치로 주제를 바꾼다. 역설적이게도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유대인들은 텍스트들을 문자적으로 취하는 반면 그리스도인들은 텍스트들의 영적 가치를 이해한다고 주장함에도 이 대목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토라를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유대교에 대해 문자적 이해를 부과하고 있다.
우리는 동의한다. 문자적으로 취해진 “눈은 눈으로”에 반영된 자비 없는 정의는 용인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정의 없는 자비—전혀 보상을 받지 못하는 영구적인 신체적 상해 또는 가해자의 경제적 지위에 기초하여 불평등한 보상을 받는 영구적인 신체적 상해—도 똑같이 용인될 수 없다. 우리가 예수를 그의 유대 전통 안에서 보면 정의와 자비라는 두 가지 관심사가 모두 유지된다. 우리는 성경을 사법적인 문제들에 대한 선례로 사용할 때—특히 성경의 자료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명확하지 않을 때—아주 조심해야 한다.
_6장 “눈은 눈으로”와 “다른 뺨도 돌려대라”
십자가 처형을 당한 사람은 질식, 극도의 피로, 장기 기능 부전, 햇빛에 대한 노출, 심장 발작, 폐색전 등으로 죽는데 일반적으로 출혈로 죽지는 않는다. 하지만 예수의 죽음에 관한 신약성경의 언어는 피로 가득하다. 신약성경은 사실 유혈이 낭자한 텍스트다. 예수는 자기의 제자들에게 포도주잔을 주면서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라고 선언한다(마 26:28; 참조. 막 14:24). 최후의 만찬 기사를 반복하면서 누가는 표현을 약간 바꾼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20). 요한복음은 한층 더 노골적으로 피를 마시라는 명령을 한다.
신약성경에서 고대의 제사들은 모두 하나로 통합된다. 즉 예수는 유월절 제물과 관련이 있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고, 그것은 속죄제물이 된다. 그리고 일단 예수가 주된 제물이 되고 난 뒤에는 다른 제물들이 필요 없게 되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특히 예루살렘 성전 파괴 후, 제사보다 회개를 강조한 예언서 텍스트들에 호소하여 다른 제사들을 거부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예컨대 마태복음 9:13과 12:7에서 예수는 호세아 6:6a을 인용한다. “내가 긍휼(히브리어 chesed; 그리스어 eleos, “자비”)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호세아서 6:6b은 시적인 병행으로 요점을 되풀이한다.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기원후 70년에 성전이 파괴된 후 제사 없이도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가능하다는 주장이 계속된다. 실제로 랍비 유대교의 방대한 텍스트에서 어떤 텍스트도 성전이 파괴된 뒤 속죄가 불가능하다거나 피가 속죄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랍비 텍스트들이 피가 속죄를 가져오는 힘에 관해 말할 때 그 텍스트들은 성전이 파괴된 후의 현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전이 사라진 후의 제의를 가리킨다. 피는 신구약 성경 모두에서 강력한 이미지로 남아 있다. 기독교의 사고에 서는 그리스도의 피가 속죄하며, 성찬식의 포도주는 문자적으로든 비유적으로든 그의 피다. 유대인들에게는 남성의 할례—와 할례의 피—가 유대인의 정체성에 핵심적인 의식으로 남아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자기들을 죄에서 구원하거나 지옥에서 구속할 예수의 속죄하는 피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지옥에 갈 것이라고 말하는 일이 드물지 않다. 그런 언급은 회개와 죄로부터 하나님께 돌이키기(shuv하기)에 대한 랍비들의 강조 등 속죄에 대한 유대교의 견해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다. 동시에 유대인들이 예수의 피에 관한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이 지닌 유대교의 배경을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특히 성전에서 드려지는 동물 제사가 부재한 상황에서 발전한 유대교와 기독교의 의식들은 두 전통이 얼마나 긴밀하게 엮여있는지를 보여준다.
_7장 “내 피를 마시라”: 제사와 속죄
그 여성에 관한 예언의 배경으로 초점을 좁히자면, 이사야 7:1은 그 예언을 한 시기가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의 아하스왕 때”라고 밝힌다. 그 상황은 정치적이다. “아람의 르신왕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의 베가왕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이 상황은 기원전 734-732년에 발생한, 학자들이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으로 부르는 것으로서, 그때 북왕국 이스라엘은 아람의 도시국가인 다메섹과 연합하여 아시리아 제국에 대항했다. 이스라엘과 아람(“다메섹”)은 남왕국 유다가 그들의 동맹에 가입하기를 원했지만, 유다 왕 아하스는 그러기를 거절했다. 현재의 이라크와 튀르키예 남동부의 대부분을 포함하는 영토를 지닌 아시리아를 이길 수 없다고 믿은 아하스는 유다를 아시리아의 봉신 국가로 만들었다.
이사야 7:14의 원래 맥락은 기원전 8세기 마지막 30년 동안의 정치적 건들과 관련이 있다. 성경의 예언자들에게는 단기간이 표준이다.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이 파괴되기 직전에 예언하기 시작한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모두 그 사건에 초점을 맞춘다. 성경의 예언자들은 멀리 떨어진 “마지막 날들”에 관한 예언을 제공하지 않는다.
이사야의 징조는 성경 히브리어에서 복수인 “너희에게” 주어진다. 왕들은 대개 그들의 조언자들로 둘러싸여 있으므로 이사야는 아하스와 그의 신하들에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복수 표현은 그것이 아하스에게만 말해진 것이 아니라 어느 시대의 누구에게나 말해진 것으로 읽는 것을 더 쉽게 만든다.
히브리어 텍스트나 그리스어 텍스트 어느 것도 기적적인 징조를 제공하지 않는다. 어느 것도 그 징조가 주어진 후 몇백 년이 지나고 나서 성취될 것으로 기대하지 않는다. 마태복음이 기록되기 전에는 어느 것도 메시아적인 인물과 관련되어 인용되지 않았다. 예수 추종자들이 그의 출생이 기적적이었다고 선포하기 시작하고 나서 이사야 7:14이 소급적으로 적절한 증거 본문을 제공했다.
_8장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으리라”
앞 장에서 우리는 마리아의 처녀성에 대한 기독교의 이해에서 이사야 7:14의 역할을 논의했다. 바빌로니아 유배 중에 쓰인 제2이사야에 등장하는 더 긴 구절이 신약성경에서 더 많이 명시적으로 인용되고 암묵적으로 언급된다. 이사야 52:13-53:12의 부분들을 명시적으로 일곱 번(마 8:17; 눅 22:37; 요 12:38; 행 8:32-33; 롬 10:16; 15:21; 벧전 2:22) 인용하는 신약성경은 이 구절에서 인류를 대신한 예수의 고난과 죽음, 그것에 뒤이은 그의 승귀와 보편적인 갈채가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일부였음을 확인한다. 이사야서에 기록된 종의 노래로 알려진 네 개의 글 중 네 번째인 이 단락은 히브리 성경에서 취한 구절이 다른 역사적·종교적 맥락에서 어떻게 다른 의미를 취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전형적인 예다.
이 구절은 예수의 구원하는 고난에 관한 주요 기독론적 주장을 요약한다. 십자가에 비추어 읽히면 이사야서의 고난받는 종은 나사렛 예수 외의 다른 인물일 수 없다. 실제로 예수가 자신이 이 종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았을 수도 있다.
고국에서 쫓겨났고 성전과 왕이 없는 공동체가 심한 죄책감을 느끼리라고 상상하기 쉽다. 의로운 행동을 요구하는 법 모음과 불의에 대해 경고한 예언자의 역사가 있는 유배된 공동체는 자기들의 상실에 대해 하나님이 부당하다고 믿으려 하지 않고 자신을 비난했다.
이것이 그의 말들이 이사야 40-55장에 수집된 익명의 예언자의 환경이다. 유배의 수렁에 빠져 있고 성전—그것은 기원전 586년에 파괴될 때까지 중요한 속죄의 장소였다—이 없는 공동체는 자기들이 용서받을 가치가 있다고 느낄 새로운 방법을 발견할 필요가 있었다. 이사야 52:13-53:12의 고난받는 종은 이 필요를 채워준다.
이사야 52:13-53:12은 많은 해석을 낳았는데 일부는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의 뉘앙스에 의해 자극되었고, 일부는 변증 목적에서 나왔으며, 또 일부는 목회적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다양한 해석은 우리에게 그 텍스트를 한 가지 방법으로 읽거나 다른 해석들을 무시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아마도 예수가 이사야서의 종임을 부인해왔던 유대인들은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예표론적으로 읽어서 이 해석을 받아들였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아마도 유대인들이 그들 나름의 이해를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이 구절을 종의 고난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높아짐으로도 보아서 모든 곳에서 고난받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제공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_9장 이사야서의 고난받는 종
마가복음에 따르면 이 표적 요청에 대해 예수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라고 말했다(막 8:12). 마가복음은 예수가 “표적을 주지 않겠다”라고 말한 것으로 기록한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다양하게 해석되는 표적을 제공한다. 마가복음보다 뒤에 기록된 이 두 복음서는 마가복음의 간략하고 좀 더 원래의 말에 가까운 언급을 반영하고 그것을 해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기들의 예수의 부활 선포와 이방인 선교 증진에 비추어 예수 추종자들은 그들의 경전을 재해석했다. 그들은 새로운 것들을 보기 시작했고, 자기들이 신성하다고 여겼던 텍스트들—그들에게 “구약성경”이 된 몇몇 형태—을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요나서에서 자기들의 믿음과 경험을 확인했다.
기원전 6세기에 바빌로니아 유배와 많은 유대인이 본국으로 귀환한 후의 여파 가운데 살고 있었을 가능성이 큰 요나서의 최초 독자들은 마흔여덟 절로 이루어진 이 메시지에서 신적 동정, 예언의 성격, 하나님의 보편성, 회개의 중요성, 그들 자신의 소명을 인식할 필요를 발견했을 것이다. 요나서는 마찬가지로 네 장으로 이루어진 룻기처럼 외부인들로부터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귀환한 공동체의 정체성을 보존하려고 했던 좀 더 민족주의적인 음성에 대응한다. 우리는 우리의 그리스도인 학생들로부터 유대교(그들은 이 단어를 통해 “구약성경”을 의미한다)는 외국인을 혐오하는 반면에 예수는 보편주의를 창안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보편주의에 대한 이 관심에 주목한다. 하지만 이런 견해와는 반대로 타나크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온 세상의 하나님이며 사람들은 민족성에 따라서가 아니라 윤리에 의해 심판을 받는다. 요나서는 모든 사람이 신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선언하는 창세기 1장과 동일한 보편주의적 전통에 속한다. 그것은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라고 명령하는 신명기 10:19을 따른다. 룻기는 모압 사람인 룻이 이스라엘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환영하며, 그녀는 다윗왕의 증조할머니가 된다. 룻기는 그곳에서 이방인들 역시 환영을 받았고 환영을 받는 예루살렘 성전과 고대부터 오늘날까지의 회당을 예견한다.
요나서는 경고이기도 하다. 요나는 자신의 소명으로부터 달아나려고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 대한 책임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책임도 회피한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향해 나아가기보다는 그것으로부터 달아난다. 요나서는 우리 모두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라는 소명을 받았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 소명이 우리의 적들과 긍정적으로 관계를 맺으라는 것일 경우에도 그 어려운 소명을 어떻게 따르는가?
요나서는 그다음에 인생에 의미가 있다고 주장한다. 주인공답지 않은 주인공인 요나는 두 번이나 다른 사람의 손에 죽기를 구한다. “그가 [선원들에게]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욘 1:12).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4:3). 죽기를 바라는 것은 바른 반응이 아니다. 요나서는 이어서 생명에 대한 이 관심을 자연 세상—바람과 비, 바다와 언덕, 큰 물고기와 큰 박, 배고픈 벌레와 회개하는 동물—으로 확장한다. 그것들은 그 이야기의 줄거리에 부차적이지 않다. 요나서는 우리의 행동이 좋든 나쁘든 자연에 영향을 주며, 자연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요나서는 어느 경우든 자연 세상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요구한다.
_10장 요나의 표적
유스티누스는 트리포가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그 시편에서 예수를 보기를 거절한다고 지적한다. 그가 옳다. 유대인들은 이 시편을 주로 에스더 왕후와 관련된 사건의 해석이나 다윗왕에 대한 언급 또는 예수 이외의 메시아에 대한 언급 등 세 가지 방식으로 해석한다. 소수의 미드라시는 시편 22편을 다른 성경 인물들에 적용한다.
시편 22편이 이전에 누구에 의해서나 그리고 누구를 위해서나 불릴 수 있도록 다양하게 사용되었다는 점과 그 시편이 유대교와 기독교의 맥락에서 다양하게 해석되었다는 점에 비추어 오늘날 우리는 그 시편의 의미를 다시금 확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가 잘못이 없음에도 고통받는다고 믿고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사람들이 예수가 그 시편을 인용한 것을 발견하고 그 시편을 예수의 죽음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연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수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그들도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한다. 만일 그들이 참으로 복음서에 따라 산다면 그들 역시 다른 사람들의 조롱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도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를 고대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시편이 에스더서에서 재사용되었다고 인식하는 유대인들은 그들의 기도가 응답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부림절(에스더 왕후가 그녀의 민족을 대량 학살로부터 구원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그리고 에스더서와 그 절기가 극복하는 반유대주의—에 접근할 수 있다.
_11장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인자”는 이스라엘의 경전들 및 그곳에서의 다양한 용법에 익숙한 사람뿐만 아니라 비유로 가르치는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완벽한 자기 호칭이다. 복음서들에 따르면 인자는 예수가 가장 선호한 자기 호칭이다.
모든 좋은 묵시론적 상징과 마찬가지로 다니엘서의 “사람의 아들 같은 이”의 해석은 여전히 열려 있다. 그리고 모든 좋은 묵시론적 텍스트와 마찬가지로 다니엘서는 어떤 상황에도 적용될 수 있는 소망의 환상을 제공한다. 황제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그가 얼마나 많이 문화와 공동체를 파괴하려고 위협한다 해도 신적 보호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하늘의 보호자는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즉 인간 남성으로) 보일 테지만, 그는 그 이상의 존재—그의 통치가 정의롭고 영원한 초자연적인 존재—일 것이다.
독자들이 다니엘서와 묵시론적 이미지 및 문헌이 억압적인 체제에 직면한 무력한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던 역사적 배경을 좀 더 잘 이해한다면, 묵시론적이고 종말론적인 인자가 오늘날 계속 할 말이 있을지도 모른다. 다니엘서와 「에녹1서」 및 복음서 전통에 등장하는 인자는 정의를 실행할 힘이 있는 하나님의 의에 대해 말한다. 이 해석은 그의 추종자들 편에서의 폭력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배제한다.
_12장 인자
실제로 메시아의 신원과 직무 기술에 관한 유대교와 기독교의 믿음이 다르기는 하지만 그들 모두 아직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교회에게 있어 새 언약의 성취는 때때로 “파루시아”라고 불리는 예수의 재림을 필요로 한다. (파루시아는 그리스어에서 정복 영웅이 자신이 새로 얻은 도시에 들어가는 것을 알리는 “등장”을 의미하는 단어다.) 전통적인 유대교는 여전히 메시아의 도래와 유배자들을 모으는 것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축하는 것을 고대한다. 현재로서는 그 프로젝트가 보류되고 있는데 이는 특히 고대의 성전 터에 현재 모스크인 바위 사원(Dome of the Rock)이 있기 때문이다. 유대교와 기독교 모두 예레미야서의 약속들과 이 약속들을 동반하는 이스라엘의 경전들의 다른 부분들을 주장한다. 그들 모두 자신의 방식으로 성취를 기다린다.
21세기에 우리는 드디어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이 공유하는 텍스트들을 다르게 읽고 서로에게 배울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상대편의 전통에 독특한 텍스트들도 읽을 수 있고, 읽어야 한다. 유대인들은 신약성경을 읽고 그것에 대한 견해를 그리스도인들과 나누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도 성경에 수록되지 않은 유대교 자료들을 읽고 그것들에 대한 견해를 유대인들과 공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는 마침내 성경의 내용이 무엇이든 성경을 제로섬 문제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변증에 기초한 이전의 몇몇 해석을 수정하고 완전한 합의는 아닐지라도 상호 존중의 가능성에 기초하여 좀 더 새로운 해석을 만들어낼 수 있는 지점에 와 있다.
_13장 결론: 변증에서 가능성으로
예수 없이 성경을 해석하는 유대교와 예수를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기독교에는 성경 해석에서 큰 차이가 발생한다. 지금까지 국내에 이런 책이 소개된 적은 없었다. 본서를 읽으면 독자는 기존에 당연하게 여겼던 익숙한 본문에 대한 자신의 성서 해석과 다른 목소리를 듣게 되고, 그것을 경청하면 익숙한 성경 본문의 의미를 폭넓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김동수 | 평택대학교 신약학 교수, 한국신약학회 회장 역임
두 저자의 관심은 상이한 해석들을 조화시키거나 화해시키려는 데 있지 않고 차이들을 존중하는 데 있다. 다양한 렌즈들을 통해 그들은 “구약성경 본문의 원의 회복”을 시도하며 “그 원의가 신약성경에서 어떻게 확장적으로 혹은 기독론적으로 해석”되는지를 보여주려고 한다. 그들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동의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더 성숙한 상호이해에 이르도록 돕는다.
김회권 |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
서로 다른 해석이 오히려 성경의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을 더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의 노력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 책은 반박이 아닌 대화를, 오해가 아닌 이해를, 무시가 아닌 존중을 지향한다. 신학자로서의 유연함과 정직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설득력 있는 언어, 배려와 이해의 진심, 그리고 각자의 전통에 대한 깊은 존중이 담긴 이 책은, 독자가 성경을 더 넓은 시야로 바라보게 만든다. 아마 신앙은 성서보다 더 크고 넓은 그 무엇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목회자, 설교자, 신학생, 성경 교사라면 반드시 정독해 보시길 권한다.
류호준 |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은퇴 교수, 다니엘의 샘 원장
유대교와 기독교는 히브리 성서(구약성서)를 공유하지만, 그것을 사뭇 다르게 읽는다. 이 책은 동일한 본문이 유대교와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다르게 수용된 복잡한 여정을 정밀하게 추적한다. 특히 창세기, 시편, 이사야서를 중심으로 한 분석은 수용의 추이를 탁월하게 보여주며, 성서 해석사에서 드러나는 연속성과 단절의 역동성을 균형 있게 제시한다. 성서를 진지하게 읽고 싶은 독자들에게 이 책은 신뢰할 만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윤철원 | 서울신학대학교 신약학 교수
성서는 공통된 텍스트이지만, 예수와 함께 읽는 기독교인의 자리와 예수 없이 읽는 유대인의 자리는 다르다. 이 책은 그 두 자리에서 비롯된 관점의 차이를 정직하게 드러내어 때로는 날카로운 논쟁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서로를 향한 따뜻한 이해와 존중의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다.
이민규 | 한국성서대학교 신약학 교수
거두절미하고, 본서의 연구 방법과 내용은 새롭다 못해 도발적이고 흥미를 넘어 충격적이다! 구약 본문 자체에 대한 1차적인 해석을 비롯하여 중간기 및 그 이후 시대의 유대 랍비 문헌들을 포함하는 확장적 이해, 신약 시대에 이루어지는 변증의 문제 등 시대와 역사, 신학적 맥락의 변화에 따라 다양하게 전환 및 확장되어온 해석의 추이를 가늠하기를 원하는 독자들에게는 이 저작이 크나큰 선물로 다가올 것이다.
주현규 |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구약학 교수
이 책은 성서 속의 두 종교적 전통이 어떻게 만나고 삼투하며 또 그 가운데 어떤 해석학적 미로들이 깃들어 있는지 계몽해 주는 귀한 자료로 연구자는 물론 일반 신자들에게도 풍성한 성서 이해의 길라잡이가 될 수 있으리라 본다.
차정식 | 한일장신대학교 신약학 교수
성경은 “한 목소리”(one voice)가 아니고 “여러 목소리”(multi voices)를 갖고 있다. 이 책은 놀랍게도 다른 이의 믿음(유대교)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우리 자신의 믿음(기독교)을 긍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동안 들어보지도 못한 유대인들의 새로운 해석을 배움으로써 우리 하나님의 풍성하고 색다른 목소리를 새롭게 듣게 될 것이다.
차준희 | 한세대학교 교수 구약학 교수, 한국구약학연구소 소장, 한국구약학회 회장 역임
저자들은 오늘의 독자가 자신 안에서의 업데이트를 넘어 자신 밖으로 업그레이드되길 기대한다. “텍스트의 신선한 포도주”를 담아내는 “그들만의 해석학적 가죽 부대”가 지난 세월 너무 낡아 냄새나고 있지는 않은지 독자 자신과 공동체를 돌아보게 해준다. 나아가 텍스트를 사랑하는 자들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자신들의 컨텍스트 안에서 진심으로 살아내고 있는지 질문한다. 레빈과 브레틀러의 역작은 한국 독자들이 “예수가 있는 교회와 예수가 없는 교회”를 읽어 내는 데에도 기여할 수 있겠다 싶다.
허주 | 아신대학교 신약학 교수
세상은 2,000년 동안 이 책을 기다려왔다.
수재나 헤셸 | 다트머스 칼리지 일라이 엠 블랙(Eli M. Black) 저명 교수
본질적인 주제들에 관해 그리스도인들을 교육하고 그들에게 도전하는 데 레빈과 브레틀러만큼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은 없다.
제임스 마틴, SJ |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The Jesuit Guide to [Almost] Everything 저자
성경해석학이 이렇게 재미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폴라 프레드릭센 | When Christians Were Jews: The First Generatrion 저자
신선하고 유익하다. 적극 추천한다.
벤 위더링턴 3세 | What They Have Done with Jesus? 저자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해석 유산 및 상대편의 해석 유산을 포용하면 이 고대의 전통들 사이의 더 깊은 이해와 존중이 강화될 것이다.
피터 엔스 | How the Bible Actually Works 저자
참으로 모든 사람을 위한 책이다.
리처드 엘리어트 프리드먼 | Exodus와 Who Wrote the Bible? 저자
저자 | (기본값:제작사 정보 미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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