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해석의 원리 (개정3판)
노튼 스테레트 | 성서유니온
13,000 11,700원
본문의 특권
아브라함 쿠루빌라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25,000 22,500원
그건 그런 뜻이 아니에요
오경준 | 비전북
16,800 15,120원
시간 순서대로 복음서 읽기
장영수(2)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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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고 오묘한 성경 읽기
James Coakley | 생명의말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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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신 예수
이상환 | 도서출판 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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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꿈꾸는 세상
안건상 | 생명의말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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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십자가 처형
유지니아 콘스탄티누 | 쿰란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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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다
유수영 | 토기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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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김성태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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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부활한 예수를 증언한다
제럴드 오콜린스 | 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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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대 카이사르
외르크 리거 | 한국기독교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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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변모
패트릭 슈라이너 | 부흥과개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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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런 뜻이 아니에요 2
오경준 | 비전북
16,800 15,120원
문맥 안에 새긴 비유 비유 안에 새긴 예수
이충재(2) | 감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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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복음 해설서 1권(말씀 1-28)에 이어 출간되는 두 번째 해설서다. 말씀 29-70의 텍스트를 다루고 있다. 부제로는 ‘안에 있는 존재의 탄생’이다. 말씀 70에서 길어낸 제목이다. 본서는 성서가 이야기이고, 히브리 문학의 배경 속에서 신약과 도마복음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어록은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툭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히브리인들 삶의 이야기 속에서 아포리즘이 생성되게 마련이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도 구약 성서의 수많은 이야기 속에 잠복되어 있는 것에서 어록으로 이끌어졌다는 것을 충분히 추론할 수 있다. 따라서 도마복음의 로기온은 온전히 그의 배후에 있는 히브리 문학의 배경과 이야기 속에서 파악해야 하고, 신약성서와도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독자는 본 도마복음 로기온 해설서를 통해 성서의 난해한 개념들을 역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성서를 통해 도마복음을 이해하고, 도마복음을 통해 성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는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만큼 본 도마복음 해설서는 텍스트의 배경으로 있는 성서의 이야기에 충실히 귀를 기울이고 있다. 도마복음과 성서는 충돌하거나 서로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서로를 풍성하게 하는 특성이 있다. 물론 근본주의 교리의 관점에서는 충돌한다. 성서는 누구나에게 개방되어 있다. 특정 교단이 주창하는 교리의 관점으로 읽는 시대는 지나갔다.
성서의 완결성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도마복음이 결핍이 있어서도 아니다. 각자는 각자의 방식으로 완결성이 충분하다. 닫힌 종교로 있는 기독교의 폐쇄성을 극복할 수 있는 출구를 찾을 수는 없을까. 그 같은 논의의 단초를 이 책에서 찾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말씀 29 육이 영 때문에 존재에 들어온다면 • 10
몸으로 인해 영이 존재하게 된다면 • 19
말씀 30 옥시링쿠스 본문의 논란들 • 25
말씀 30-1 홀로 하나 • 30
말씀 30-2 돌을 들고 나무를 베라. 그곳에 내가 있다 • 36
세 신과 ‘나’의 관계 • 37
말씀 31 무속과 신흥종교가 발흥하는 까닭 • 46
말씀 32 산 위에 견고히 서 있는 성읍 • 51
말씀 33 한 귀one ear와 또 다른 귀in the other ear • 56
말씀 34 눈먼 자가 빠지는 구덩이 • 62
말씀 35 강한 자를 결박하고 늑탈하는 것 • 70
말씀 36 우상을 섬기는 자가 염려와 길쌈을 한다 • 80
말씀 37 근원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때 • 88
말씀 38 조금 있으면 • 98
말씀 39 영지와 영지주의 • 107
말씀 40 이방의 포도나무 • 118
말씀 41 무엇을,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 122
말씀 42 머물지 마라 • 128
말씀 43 유대인의 질문방식 그리고 나무와 열매 • 134
말씀 44 모독과 사하심 • 143
아버지를 훼방하는 자가 사하심을 받는다 • 144
인자를 훼방하는 자가 사하심을 받는다 • 148
성령을 훼방하면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 • 150
말씀 45 낙타의 등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다 • 153
마 6:19-21 오역한 개역성경 • 156
말씀 46 여인이 낳은 큰 자와 말言의 구원 • 160
여인이 낳은 자 • 162
말씀 47 두 마리의 말과 두 개의 활 • 167
말씀 48 긍휼과 진리의 만남, 의와 화평의 입맞춤 • 174
산을 옮긴다는 것 • 176
말씀 49 모나코스와 소티프/단독자와 선택된 자 • 183
선택된 자 • 184
말씀 50 네 안에 있는 빛-움직임은 있을 뿐, 쉼은 없다 • 188
말씀 51 아나파우시스-죽은 자의 안식에 관하여 • 194
말씀 52 죽은 사람, 살아있는 사람 • 201
말씀 53 할례는 유익한가 • 209
말씀 54 가난한 자와 부자 이야기 • 214
말씀 55 부모와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것과 제자가 된다는 것 • 223
말씀 56 세상과 시체 • 232
말씀 57 좋은 씨와 가라지 • 236
말씀 58 고난과 생명 • 242
말씀 59 산 자는 산 자를, 죽은 자는 죽은 자를 주목한다 • 247
말씀 60 먹거리의 두 규칙 - 죽여서 먹는 것과 살림(맺음)으로 먹는 것 • 252
말씀 61 죽은 자는 죽을 것이고 산 자는 살 것이고 (한 사람은 살고 한 사람은 죽고) • 256
말씀 62 은밀(무스테리온)과 오른손 왼손 • 265
말씀 63 돈이란 무엇인가 • 269
말씀 64 장사꾼과 상인들 • 274
말씀 65 소작인은 부자인가 가난한 자인가 • 279
말씀 66 건축자의 버린 돌은 무엇일까 • 286
말씀 67 모든 것을 알고 하나를 모른다면 • 292
말씀 68 박해한 곳에서 박해할 곳을 찾지 못한다 • 297
말씀 69 마음에서 박해 받는 자 • 304
말씀 70 네 안에 있는 존재를 낳으면 • 312
참고문헌 • 319
인생은 그가 누구든, 처음에는 프로스 톤 코스몬(세상을 향한)의 의식 활동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로기온 28에서 언급하고 있는 술 취함이다. 모든 인생은 큰 자를 향해서 의식의 활동이 이뤄진다. 그 정점에 예수가 있고, 하나님이 있고, 부처님이 있고, 큰 자가 되려는 것에 빛을 비춰주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
인간이 낳고 키우는 ‘신’은 본래부터 내가 낳기보다는 전승되어 온 것을 받아들이면서 시작된다. 인류의 집단 무의식이 낳고 키운 신이다. 내가 합세하여 나의 지향성에 따라 나도 그를 새롭게 낳고 더 완벽한 신으로 도금하고 덧입힌다. 신을 낳고 키우고 새로운 옷을 입히는 연금술사가 된다.<p.12>
도마복음은 114개의 어록이다. 어록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어록이라고 해서 다를까(?) 수많은 삶의 이야기에서 아포리즘은 탄생한다. 그러므로 도마복음은 성서의 이야기 속에서 그 주옥같은 어록의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성서의 이야기 속에서 도마복음을 읽으면 어록이 더 잘 읽힌다는 나의 견해는 그런 점에서 여전히 유효하다고 여긴다.<p.24>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예수와 어느 율법사의 대화에 등장하는 위의 규칙은 해석과 관련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1.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 2. 어떻게 읽느냐? 무엇이라 기록되었는지는 본문 비평의 문제요, 어떻게 읽느냐는 해석의 문제다. <p.30>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라는 속담은 인생살이의 맥락 속에서 만들어진 잠언Proverbs이고 속담이다. 아포리즘은 언제나 그 시대 사람의 삶살이 속에서 생성된다. 그러므로 나무와 돌은 그 시대의 이야기 속에서 그 의미가 찾아져야 한다. 내가 도마복음과 성서 속 수많은 이야기를 연관하여 생각하는 이유다. <p.39>
하나님은, 천주님은 산 넘고 물 건너에 있거나 저 하늘 어디엔가 있지 않다. 천주님은 나무에 있거나 돌에 있거나 바다에 있는 게 아니다. 그대 안에 있는 ‘하나님’을 그대가 부정한다. 자꾸만 밖에서 찾으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대 안에 ‘하나님’은 없고 온갖 미혹과 탐진치貪瞋痴만 들끓고 있고 복마전이 되어 있으므로 귀신을 쫓아내 줄 누군가를 찾는다. 영험한 무당을 찾으려 한다. <p.49>
속에서 그에게 들은바, 즉 지성소의 하나님에게서 들은 것을 나의 이해력과 마음의 귀에 전파하는 것이다. 들은 바를 다시 듣는 것 그것은 호크마의 깨달음을 숙성의 과정을 거쳐 더 넓고 깊은 이해 곧 비나(총명)에 다가서는 일이요. 돈오頓悟의 깨달음을 점수漸修로 그 깊이를 더해가는 것과 같다. <p.57>
존재를 담아낼 수 있는 이성적 언어가 한계에 있을 수밖에 없기에 시가 존재하고 시인이 존재한다. 비유와 상징이 아니면 담아낼 수 없는 정신의 풍요로운 존재계가 있으므로 예술가가 존재한다. 오늘도 많은 이야기가 창조되고, 새로운 이야기가 쓰이고, 새로운 드라마가 만들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심리학과 정신분석, 그리고 철학으로는 존재의 이야기를 모두 담을 수 없어 오늘도 무수한 이야기들이 만들어지는 것 아닌가. 판타지 소설과 가상의 신화적 캐릭터가 작가와 배우들에 의해 끊임없이 창조된다. 여전히 신화가, 이야기가 정신의 세계를 이끌어가는 것이다. 신화시대와 역사시대의 구분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로되 매우 단선적인 구분이라는 말이다. <p.66>
예수는 강한 자를 결박하고 그 안에 서 있는 세간살이를 늑탈했다. 성전 안에 있는 장사꾼들에게 채찍을 휘두른다. 성전 청소가 예수의 일이다. 유대교의 신을 결박하고자 그 신을 탄핵하고 그곳에 서 있는 신을 하늘에서 떨어뜨린다. 우주의 창조신은 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네 안에 있고 우리 안에 있음을向我設位 천명한다. …… 니체는 예수가 결박한 유대교의 신을 기독교가 되살려놓고 인류를 혼란케 하던 서구의 신을 향해 사망을 선언했다. 강한 자를 결박했으나 여전히 서구의 기독교는 강한 자로 다시 되살려놓고 있다. 서구의 신은 변신을 거듭하며 자기 자리를 떠나지 않고 한국에 와서 더욱 그 기세를 구가하고 있다. 서구의 지성이 더욱 공교하게 옷을 입혀 살려놓고 또 살려놓는다. 한국의 기독교는 강한 자를 결박하기는커녕 우상으로 우뚝 세워놓고 수많은 영혼을 살해하고 있다. 유사기독교는 강한 자를 더욱 강하게 키워 그를 좇는 무리를 종교 감옥에 처넣고 노예로 삼는다.<pp. 76-78>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는 ‘지금까지 너희가 보던 나’를 보지 못한다는 뜻이니 ‘세상 임금’ 예수로는 이제 더는 볼 수 없으리라고 한다. 신의 죽음을 말한다. 세상 임금의 죽음이요 큰 자를 지향하는 우상의 죽음이다. 그러나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는 신의 죽음 후 신의 다시 나타남을 보리라 이니 신 죽음 후의 신의 부활이다. 거기서 신은 새로운 실재로 드러난다. 향벽의 신 죽음 후, 향아向我 신의 부활을 예고하는 진정한 혁명과 후천개벽의 나팔 소리다. <p. 106>
영적인 앎이 선악의 지식으로 변모하는 것, 그것이 영지주의적 특성이다. 영지가 생명이라면 영지주의는 영적 지식을 육체의 생각에 묶어두어(변모시켜) 사망으로 작용한다. 이는 북방의 지식을 흠모하다가 마침내 북방의 포로가 되어 바빌로니아의 지배 아래 복속되는 것과 같다. 영적인 앎을 권력으로 삼고 타인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삼는 모든 형태는 영지주의에 속한다. 그 지식의 종류와 사상이 무엇이냐는 그때그때 다르다. 가현설을 주장할 수도 있고, 영육 이분법에 따라 영은 고귀하고 육은 악하다는 이분법일 수도 있다. <p.112>
‘지나가는 사람이 돼라.’ ‘머물지 말라.’ 로기온 42는 생명의 속성을 간결 명쾌하게 담고 있다. 단지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가 돼라’라는 식의 주석은 이 말씀의 본질을 놓치고 크게 훼손한다. <p.129>
도마복음 로기온 44는 혁명의 복음이다. 아버지를 말로 모독하면 그 사안에 대해서 용서받는다는 말일까. 아니다. 생명의 원리와 관련하여 근본의 문제를 언급한다.
예수는 아버지를 모독할 뿐만 아니라 신을 모독한다. 모든 향벽설위의 신은 죽은 신이고 사망의 신이고 거짓의 신이고 살인자의 신이라고 신을 모독하지 않으면, 신 죽음을 선언하지 않으면 사함이 없다. 신 죽음의 선언에 동방에서는 동학의 최재우가 동참했다. 이 땅에 선교사가 가져온 서학은 유사 유대교였다. 서학은 예수도가 아니라 변형된 유대교요, 다만 그리스도교라는 옷을 입고 있었을 뿐 최재우가 통렬하게 지적한 대로 향벽설위의 거짓 신이었다. 인간의 고혈을 빨아먹는 흡혈의 신이고 탐관오리의 신이다. 인육제사를 요구하는 모든 신에 대해 우리는 궐기해야 하고 모독하고 훼방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의식은 해방을 맛보고, 심판에 머물지 않으며 야웨 엘로힘의 부활이 이뤄진다. 신 죽음 속에 신의 꽃이 피어난다. <pp.146-147>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고 두 마리의 말을 동시에 탈 수 없고 두 개의 활을 쏠 수 없는 자명한 이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그 의식 활동은 끊임없이 둘을 섞어 합금을 만들려는 시도가 무한 반복되고 있어서 로기온 47은 오늘도 우리에게 무서운 경구로 읽힌다. <p.173>
다나토스에서 죽게 되면 비로소 찾아오는 것이 안식이다. 더는 갈등과 전쟁을 겪지 않는다. 아니 그것이 지나가게 된다. 그렇게 죽은 자를 네크로스라 일컫고, 여기서 비로소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사는 새로운 존재가 태어난다. 이를 안식과 더불어 새로 태어난 존재 ‘셋’을 일컬어 부활, 곧 아나스타시스라고 일컫는다. <p.198>
탕진해야 가난한 자가 된다. 교만이 하늘 높이 치솟아 뭇별 위에 비길 자 없음의 지혜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드러나야 탕진이 이뤄진다. 열등의 나락에 빠져 저 지옥을 다녀와 본 이가 열등의식이 뼈를 상하게 하고 인생을 죽이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의식의 창고에 가득 담겨 있는 열등의 소유물을 내어버리기 전에는 그것에 발목 잡히고 열등의식의 노예가 된다. 자신의 삶을 피폐하게 한다. 자신의 소유물에 의해 자신의 삶이 규정된다. 거기 존재는 없고 그가 가진 재물, 열등의식과 우월의식 사이의 시소게임만 있다. 부자가 가난하게 되려면 소유를 탕진해야 한다. <p.217>
우리는 성서가 이야기이고, 성서의 무수한 많은 이야기 속에서, 히브리 문학의 배경 속에서 신약과 도마복음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이점은 마가복음이 먼저인가 도마복음이 먼저인가의 물음보다 훨씬 중요하다. 따라서 도마복음의 로기온은 온전히 그의 배후에 있는 히브리 문학의 배경과 이야기 속에서 파악해야 온전히 읽힌다. <p.231>
세상의 질서 정점에 세운 그대의 예수, 그대의 하나님, 그대의 엘로힘이 ‘시체’임이 드러나기 전에는 결코 그곳에서 해방될 수 없다. 하나님은 결코 그렇게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대 안에 있고 내 안에 ‘없이 계신 존재’로 있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한 마음의 자리에 생명의 숨결로 있을 뿐, 세상의 정점에 사자의 형상으로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신이 죽어야 신이 살아난다. 신의 죽음의 자리에 신이 태어난다. 신 죽음과 신의 복권은 그대에게서 시작된다. <p.235>
초막절은 그것이 풀로 지은 임시 거처임을 깨닫고 초막집을 불태우는 때다. 비록 그때에는 모세가 필요했다. 그때에는 엘리야가 필요했고 그때는 예수가 필요했고 그때는 노자가 필요했고 그때는 수많은 철인의 사유와 사상의 집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들의 집은 내 집이 아니다. 잠시 머무는 처소다. 영원히 머무는 집이 아니다. 풀로 지은 집이 아닌 영원한 집, 하늘의 장막 집에 머물게 될 때, 땅의 장막 집은 불타 없어진다. <p.239>
도마복음과 성서의 텍스트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관점도 전기와 후기가 확연히 다르다. 전기의 방식으로 대부분 인생을 송두리째 소진한다. 사울의 시각이 피 흘리기 전에는 탈 유대교, 탈 기독교가 불가능하다. 다메섹의 한 가운데서 사울은 바울이 된다. 큰 자의 시각에서 벗어나 작은 자의 눈으로 바뀐다. 비록 고난이어도 큰 자의 죽음을 맞이하고 나서야 작은 자 아담 아파르(티끌 사람)가 되어 생명에 눈뜨게 된다. 돌비에서 심비의 대전환이 이뤄진다. <p.245>
산 자 예수가 죽은 자 베드로의 충성심을 덥석 받으면, 다시 말해 ‘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라는 죽은 자 베드로의 충성을 덥석 받아서, ‘베드로야 네 믿음이 참으로 아름답구나! 네 믿음이 너를 구할 것이다’라고 죽은 자의 믿음에 주목한다면 예수는 한 걸음도 앞으로 더 나갈 수 없을 것이다. 베드로는 바로 그 자리에 예수의 초막을 짓고 대대손손 그 자리를 고수할 것이다. 유대교가 그러하고 오늘 한국의 기독교 모습이 그러하다. 예수는 죽은 자의 충성 서약과 고백을 단칼에 거절한다. 죽은 자를 주목하지 않는다. 산 자가 죽은 자를 주목하게 되면 그에게서 산 자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p. 250>
그들의 미소는 자애의 눈빛이 아니다. 아직은 잡아먹을 때가 아니어서 유목민이 목축하듯, 자애로운 눈길로 양에게 먹이를 주며 기르고 있는 눈빛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마침내 시체를 만들어 죽이려는 흉계다. 그들의 자애로운 눈빛은 목에 들이대는 빨대일 뿐이다. <p.255>
날마다 죽는 나와 날마다 사는 나가 한집에 있다. 한 침대에 있고, 한 식탁에 있고, 한 맷돌을 돌린다. 한 밭에 있다. 한 곳에서 나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 한 식탁에서 함께 밥을 먹고 있으나 둘은 마주 보며 등을 대고 있다. <p.257>
기도는 은밀한 중에 계신 이와의 만남이다. 은밀한 생명과의 밀어다. 은밀함이란 밀교 적이거나 숨어서 행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은밀함이란 존재와 나타난 것 사이에 있는 비밀스러운 역동성이다. 육체의 언어는 생을 단절시킨 토막 난 시체 조각이다. 기도란 토막 난 시체 조각을 양식으로 먹는 삶을 거절하는 것, 도리어 나타난 것과 존재 사이를 산책하는 무한 여행이다. <pp.266-267>
왕국은 가난한 자의 몫이다. 모두를 탕진하고 빈털터리가 된 둘째가 그 자리에 초대받아 가락지空를 손가락에 끼운다. 왕국은 저는 자, 눈먼 자들의 몫이다. 본다고 하는 자들의 몫이 아니다. 실족게 하는 한눈을 빼어버린 외눈박이의 몫이며 환도 뼈가 부러져 절름발이가 된 이들의 몫이다. 오른손이 죄를 범하는 것을 보고 오른손을 베어버린 사람들의 몫이다. 곧은 목이 베어져 소반 위에 담기고 후에 다시 태어난 이들의 몫이다. 소 다섯 마리를 팔고 사는 일이 남아 있는 이들에게 왕국은 참여할 수 없다. 장사를 모두 끝내고 탕진한 후에나 가능한 곳이다. <p.278>
언제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엄명을 내린 적이 있던가. 그러나 맏아들은 아버지를 고리대금 업자로 만들고 소작료를 요구받고 있다. 아버지는 한 번도 소작료를 요구한 적이 없거늘, 스스로 소작료를 요구받는다. 종들을 통해 전해지는 그 모든 말씀을 소작료 요구로 해석한다. 소작인에게 주인은 부자요 자신은 가난한 자다. 모든 게 아버지의 것이므로 제 것이 하나도 없다. 날마다 염소 새끼는 언제 잡아 줄 것이냐고 기도한다. 그의 기도는 불평의 다른 이름이다. <p.283>
그대가 선택한 부자 엘로힘, 엘샤다이 엘로힘이 부정되어야 그대가 버렸던 야웨 엘로힘이 모퉁이 돌이 된다. 그대가 선택한 부자 그리스도, 엘샤다이 그리스도가 부정되어야 예수가 말한 그리스도가 모퉁이 돌이 되어 그것을 토대로 새로운 집이 지어진다. 카발라에서는 건축자가 선택한 돌을 부정하는 사건을 일컬어 아인, 아인소프, 아인소프 오르라 한다. 아인소프 오르가 찾아오고 나서야 버려진 돌이 모퉁이 돌이 되어 그것을 토대로 그대의 새로운 베이트(집)가 건축된다. <p. 290>
태초에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고 인간을 창조했다지만, 태초에 인간은 신을 창조하고 또 저마다의 욕망을 좇아 수많은 신을 낳고 저마다의 신에게 이름을 부여하며 작명한다. 본능을 따라 그렇게 하는 것을 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알아 그것을 실천한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서 취하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들을 힘껏 지키고 또 지킨다. 향벽설위의 제사법을 좇아서 사는 법을 안다. <p. 294>
오늘도 여전히 기독교인들은 부자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 그러면서 언제나 염소 새끼 타령을 한다. 직장에서 승급을 기도한다. 더 많은 재산을 불려달라고 기도한다.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게 해달라고 그의 부자 아버지에게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위에 있을지언정 아래에 있지 않게 해달라고 애걸복걸한다. 부자인데 종과 노예로 산다. 아들로 사는 게 아니라, 노예로 산다. 뿐만일까. 둘째 아들을 부정한다. <p. 301>
없는 데 있는 것은 묘유妙有다. 오온五蘊으로 쌓여 있던 것을 베어 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공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묘법妙法이다. 그러므로 반야심경에서는 이를 일러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 한다. 만물이 공의 바탕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색의 집착을 떠나고 나서, 모든 색은 공이라는 것이 찾아오고 나서야 비로소 공즉시색이 찾아온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이 먼저고 공즉시색空卽是色이 나중이다. 둘은 동의어거나 동어반복이 아니다. <p. 315>
‘도마’가 쌍둥이란 의미를 갖고 있듯이, 성서와 도마복음도 쌍둥이로 이해될 수는 없을까? 마치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이 서로 직접 연관이 없지만, 그 둘이 성서의 시작과 끝을 이루면서 한 쌍둥이가 되었듯이 말이다. 히브리어와 콥트어를 비롯한 해박한 성서언어 연구자인 저자는 이 책에서 그런 상상력을 갖고 도마복음을 멋지게 해설해 주고 있다. 도마복음의 깊은 깨달음의 세계에 관심을 가진 분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일독을 권한다.
손원영╷서울기독대학교 교수 ∙ 도마복음연구회 회장
기존의 도마복음 연구는 동양 철학이나 다른 종교 전통의 관점에서 이루어졌다. 반면 저자는 기독교 정경 복음서와 유대 신비주의 관점에서 도마복음에 접근한다. 이 책은 정경 복음서와 유대 신비주의 틀로 파헤친 본격적인 도마복음 연구서다.
移例, 가천노 박사 ∙ 종교개혁자
저자 | (기본값:제작사 정보 미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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