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이스라엘 역사 (아브라함에서 에스라까지)
윌리엄F.올브라이트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6,000 5,400원
열린다 성경 (성전이야기)
류모세 | 두란노
14,000 12,600원
성경과 5대 제국
조병호 | 통독원
19,000 17,100원
만화 성경 역사 속의 고대 제국
크레마인드 | 생명의말씀사
18,000 16,200원
통박사 조병호의 신구약 중간사
조병호 | 통독원
16,000 14,400원
중간사 수업
박양규 | 샘솟는기쁨
19,800 17,820원
잃어버린 400년
강학종 | 세움북스
15,000 13,500원
PPT로 함께 보는 한영 신구약 징검다리 중간사
김연희, 이종호, 이대복 | OBI출판사 (오비아이)
20,000 18,000원
성경과 고대전쟁
조병호 | 통독원
17,000 15,300원
고대근동의 신화와 성경의 믿음
맥컬리 R. 포스터 | 감은사
22,000 20,900원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윌리엄 데버 | 삼인
30,000 28,500원
성서와 역사관
위거찬 | 지민(도)
18,000 16,200원
(고대 근동 시리즈 15) 이스라엘과 고대 근동의 점술
강승일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18,000 16,200원
성경과 5대제국 (영문판) The Rise and Fall of the 5 Empires in the Bible
조병호 | 통독원
17,000 15,300원
(고대 근동 시리즈 16) 고대 이스라엘 문화와 구약성경 - 구전 문화와 문자 문화
수잔 니디치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15,000 13,500원
이 책은 1991년에 미국 성서고고학회 (Biblical Archaeology Society)에서 주최하여, 워싱턴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미국 학계를 대표하는 성서학자, 성서역사학자, 고고학자, 이집트 학자 등이 실행한 강연을 책으로 엮여 낸 것이다.
이 책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강연 때 학자들이 정리해서 발표한 내용들이 현재 미국 주류 학계의 정설처럼 인정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출애굽, 가나안 정복,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구이며, 팔레스틴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언제, 어떠한 과정을 통하여 정착하게 되었는지를, 현재까지 연구된 고고학, 성서학적 증거들, 또한 이집트 등 성서외적 자료들을 근거로 밝히고 있다. 출애굽 같은 사건을 완전히 허구로 치부해버리는 독일의 학계와 달리, 비록 성서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과는 차이가 있을 지라도, 출애굽이 어느 정도 역사적 근거가 있음을 각종 고대근동의 자료, 고고학적 증거와 중요한 성서구절의 해석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의 기원을 12세기 말엽, 팔레스틴 중부 산간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한 여러 사람들의 모임으로 보면서, 그에 대한 고고학적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제1강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현재까지 알려진 사실들|허셸 섕크스(Hershel Shanks)
제2강
이스라엘인과 가나안인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윌리엄 데버 (William G. Dever)
제3강
출애굽, 사실인가 신화인가?|바룩 할퍼른(Baruch Halpern)
제4강
이스라엘 종교의 기원|카일 맥카터(P. Kyle McCarter, Jr.)
패널 토의
[패널 토의]
허셸 섕크스: 제 동료들이 여러분께 강연할 때, 제가 보기에는 지나치게 공손했던 것 같습니다. (웃음) 오늘 강연자들이 한 말들 중에 “이 친구가 말한 것은 정확합니다,” “저는 이 친구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이런 표현들이 좀 많았지요? 아직도 오늘 강연자들과 생각을 달리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오늘 참석하지 않은 이스라엘 핑켈슈타인, 노만 갓월드, 아담 제르탈 같은 학자들이지요. 그러므로 이렇게 오늘 강연자들이 서로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오늘 참석하지 않아서 자신들의 다른 견해들을 피력하지 못한 다른 학자들도 있음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빌 [데버], 당신의 말을 듣다보니, 제 생각에는 바룩 할퍼른이 당신과 견해를 달리할 요소들이 많을 줄 알았는데, 제가 할퍼른 옆에 앉아서 그를 보니 그는 당신의 말에 동의하면서 계속 고개를 끄덕이더군요.(웃음) 청중께 묻겠습니다. 만일 여러분중에 빌 데버의 강연이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주세요. 몇 명이나 될까요? (웃음) 그러면 몇 명이나 데버의 강연이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글쎄요, 2대 1로 빌의 편이 더 많군요.
저는 오늘 강연자들에게 그들 간의 견해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물어보면서 오늘 토의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좀 구체적으로 물어보겠습니다.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성경의 내용을 신뢰합니다. 성경은 다윗 시대 이전에는 예루살렘이 정복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즉 다윗 때에 와서야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땅이 된 것이지요. 이는 성경도 어느 정도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비록 여호수아서에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위한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만일 성경의 저자들이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라면 그들은 예루살렘도 일찍이 정복했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분명 이 예루살렘 전쟁에 대한 전승은 우세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의 저자들은 다른 도시들에 대해서는 정직하지 못한 기록을 남겼을까요? 저는 일부 학자들처럼 성경을 믿을만하지 못하다고 치부해버리지는 못하겠습니다. 성경 내에서도 구분을 해야합니다. 저는 우리의 논의의 중요한 일부분인 메르넵타 석비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고자 합니다. 이 석비가 없었다면, 기원전 1200년 이전에는 이스라엘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결론내리기가 쉬웠을 것입니다.
카일 [맥카터]은 그가 대학원에 재학중일 때만해도 메르넵타 석비의 연대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왔을 가장 늦은 연대로 알려졌었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이것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기원전 1200년경에 비로소 등장하기 시작했지요. 고고학적으로 이 새로운 사람들은 기원전 1200년경부터 등장했는데, 이집트의 석비는 그 땅에 이미 이스라엘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보고해주는 상황인 것이지요. 하지만 카일은 이 사람들은 우리가 나중에 알게 된 이스라엘이 아니고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사람들이 무엇으로 구별될 수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종교일까요? 무엇이 그들의 민족정체성을 구별지었을까요? 앞에서 말한 옷 입는 방식, 음식, 종교 등 여러 다른 특징들이 있었습니다. 이 이론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두 부류가 있었는데요, 하나는 메르넵타 이전의 이스라엘이고, 다른 하나는 고고학적 자료들이 입증해주는 철기시대 이후의 이스라엘입니다. 저는 여기서 말을 마치고 오늘 강연자들에게 말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어떤 견해의 차이가 있는지 보겠습니다.
윌리엄 데버: 제가 바로 답을 해야겠네요. 허셸은 있지도 않은 문제를 만들어냈습니다.(웃음) 그러므로 쉽게 답을 줄 수가 있지요. 우리는 지나치게 정확하게 연대를 밝히려고 노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원전 1200년경이라고 말하면, 그건 말 그대로입니다. 제 생각에 허셸과 카일 둘 다 이 문제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정착지들 중에서 이른 것들은 기원전 1230년 또는 1225년에 세워진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고고학자들이 이에 동의할 것입니다. 도자기들은 여전히 기원전 13세기 청동기후기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미케네 문명의 IIIB 형태의 도자기들도 발견되었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기원전 1200년경이라고 할 때, 그 말을 지나치게 정확한 것으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사실 메르넵타 당시 이스라엘인들이 이미 정착한지 20년에서 30년가량 지났다고 주장하는 데에 고고학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이정도면 그들이 정착해서 앞에서 말한 민족적 경계짓기를 하기에 충분한 시간입니다. 그만큼 오랜 시간이지요. 그러므로 허셸이 제기한 문제는 단순히 어의의 문제입니다. 쉽게 해결될 수 있지요.
섕크스: 어떻게 말인가요?(웃음)
데버: 두 이스라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입니다. 이스라엘의 정착시기를 조금만 앞당겨도 이러한 발전이 일어나기에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생깁니다. 그렇게 연대에 대해 압박감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카일 맥카터: 이제 우리 모두가 동의할만한 것을 말해보겠는데요,(웃음) 그런데 핵심은 이스라엘에 속한 사람들의 수가 점점 많아졌다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주해 온 것이 아닙니다. 저는 두 이스라엘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 아니지요. 적은 수의 집단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제 말은 이스라엘이라는 소수의 집단이 있었는데요, 문제는...
섕크스: 그들이 어디에 있었지요? 도시에 있었나요?
맥카터: 아니요, 산지에 있었습니다.
데버: 그들 중 일부는 초기의 새로운 마을들에 살았지요.
맥카터: 옳습니다. 우리가 더 연구해야하고 이해해야 할 문제는 이전에는 이스라엘인이 아니었던 사람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이스라엘인이 되었냐 하는 것입니다.
데버: 정확한 표현입니다.
맥카터: 이게 바로 민족적 정체성의 확립과정입니다. 우리 분야에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던 문제이지요. 그러나 다른 학문에서는 많이 이야기되는 주제입니다. 우리는 폴 랩스(Paul Lapps)와 다른 학자들에게서 민족 정체성을 발전시키고 유지하기 위해 어떠한 과정이 필요한지를 배워야 합니다.
데버: 그러나 우리 고고학자들도 인지하고 있듯이, 어려운 문제는 고고학 기록에 나타난 문질문화를 통하여 어떻게 민족을 구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특징적인 행동양식이 고고학 유물에 남을까요? 가옥의 형태 같은 것들은 고고학적으로 알 수 있고 이는 사회구조나 가족의 형태가 어떠했는지 정보를 줍니다. 다른 것들은 고고학적으로 잘 보존되지 않는데 특히 안타깝게도 종교적 행동양식이 그렇습니다. 산간지대 이스라엘인들의 거주지에서 그들의 종교에 대해 알 수 있을만한 유적이 별로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종교가 그들의 삶에 중요 요소가 아니라는 말은 아닙니다. 저는 종교가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고고학적으로는 이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산당이나 신전이 발견되지 않은 것도 중요합니다. 이는 어쩌면 저 개인적으로 아주 초기부터 존재했다고 생각하는 야훼신앙이 아직 구체화되지 않았음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아직 공식적인 제사장도 없었습니다. 예배를 드릴 성소도 없었지요. 만일 평범한 이스라엘인들도 어느 곳에서든 기도를 하고 제사를 바칠 수 있었다면, 이에 대한 기록은 고고학적으로 남지 않겠지요. 고고학의 침묵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허셸이 말하는 것과 같은 사상을 입증할 증거로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일 뿐이지요.
맥카터: 허셸, 오늘 내가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하나 있는데, 바룩 할퍼른이 우리 분야에서 자주 다루어지는 아주 중요한 내용을 말한 것이 있는데, 나는 이것이 소수의 견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설명을 좀 하겠습니다. 바로 아피루에 대한 문제입니다. 아피루가 어떠한 사람들입니까? 오랫동안 널리 알려졌던 이론이 바로 아피루를 히브리(ivrim)와 관련짓는 것입니다. 이 둘은 같은 단어로 생각되어 왔습니다. 원래 사회적 집단을 가리키던 아피루라는 단어가 “히브리”라는 민족적 용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주장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증거들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바룩이 말한 것을 듣다보니, 그는 이 주장이 옳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저는 아피루 현상을 통하여 우리가 초기 이스라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음에 동의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피루와 히브리가 같은 단어라는 것은 아닙니다. 좀 더 설명하겠습니다. 우리가 아는 한, 아피루는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되던 단어입니다. 이는 단지 이집트어가 아닙니다. 사실 이 단어는 간접적으로만 이집트어 단어입니다. 본래 이 단어는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사용되던 북서셈어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다른 사람에게 예속관계에 있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것이었습니다. 아피루는 무언가를 위하여 고용된 사람입니다. 군사적으로, 집안일로, 또는 다른 어떠한 종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 단어의 어근적 의미는 예속관계를 의미하는 것이지요.
기원전 이천년대에 한 때 아피루라는 단어와 신의 이름을 포함한 인명들이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아피르-다간(Apir-dagan)이라는 이름은 다간 신의 부하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아피루는 예속인들이었습니다. 이 단어는 주로 하층민들, 스스로를 다른 사람에게 팔아넘기는 용병들과 같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좋지 않은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이게 꼭 나쁜 것은 아닙니다. 비록 제 동료들이나 여러분들에게 고지식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저는 “히브리”라는 단어의 어근은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의 전승은 일관되게 “히브리”라는 용어는 민족을 지칭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브네 이스라엘(이스라엘인들)이라는 말은 민족, 국가, 정치적 용도로 사용될 수 있지만, 이브림(히브리)은 성경에서 항상 민족을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이스라엘인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민족적으로 가나안인들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자신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유프라테스강 건너편에서 왔다고 주장하지요. “trans”라는 말은 히브리어에서 “에베르”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19세기에 성서학자들은 “히브리”라는 말이 바로 이 “에베르”(건너서, 가로질러)에서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이 사람들은 이곳 출신이 아닌, 저쪽 건너편에서 왔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 주장이 여전히 옳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부터 백년전 학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는 더 옳았던 것이지요. 히브리를 아피루와 연결시키는 것은 재치있는 생각이지만 옳은 것은 아닙니다. 아피루가 아닌 하비루(Habiru)라고 읽곤 했을때는 아인, 페, 레쉬 대신에 아인, 벧, 레쉬이기 때문에 히브리와 더 들어맞는다고 생각했겠지만, 어쨌거나 저는 이것이 틀렸다고 봅니다. 자 이제 제가 왜 틀렸는지 말씀 좀 해주시지요.(웃음)
바룩 할퍼른: 저도 동의하는데요. (웃음)
맥카터: 그건 자네가 아까 한 말이 아닌데...
할퍼른: 사실, 제 말은 카일이 말한 것이 부분적으로 옳다는 말입니다. 아피루는 기원전 이천년대에 사용되던 그런 민족적 용어가 아닙니다. 이브리(히브리)는 성경에서 민족적 용어입니다. (이 단어는 성경 이외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이브리는 커다란 집단의 사람들에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성경의 족보에서 에베르(창세기 10:24)라는 시조의 후손들입니다. 여기에는 예멘에서 중앙 시리아, 그리고 유프라테스의 사람들까지 포함됩니다. 이게 민족 공동체입니까, 아닙니까? 만일 이게 민족 공동체라면 오직 성경에서만 그렇게 등장하는데, 이는 실제로가 아닌 단순히 관념적으로만 민족 공동체입니다. 민족이란 마음속에 있는 것이지요. 하나의 관념일 뿐입니다. 오직 이스라엘인들의 관념속에서만 이들이 한 민족 공동체입니다.
이 민족 공동체의 이름이 “예속관계”를 의미하는 단어에서 온 것일까요? (저는 꼭 이 단어의 의미가 그러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원전 이천년대 하반기에 아카드어 문서에서는 이 단어는 주로 도적들을 의미했습니다.) 둘째로, 이 단어는 그들의 혈연관계에서 단절되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하던 사람들에게 적용되었습니다. 진짜 문제는 어떻게 사회적 지위와 관련된 단어가 민족 공동체를 지칭하는 단어로 바뀌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언어학적인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비루”는 아카드어 음절표현 방식에서 항상 p가 아닌 b로 표기되었기 때문이지요. 아마도 b와 p는 서로 바뀌어 사용될 수 있었나봅니다.
섕크스: 여기서 더 이상 깊이 들어가다간 여기 계신 청중들 다 떠나버리시겠습니다.(웃음)
할퍼른: 더 깊이 들어가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지요. 이 단어가 본래 민족을 지칭하는 것이었는데 민족 공동체란 것의 특성 때문에 사회학적 용어로 바뀌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집단에서는 여전히 민족적 성격을 유지한 것일까요? 아니면 이 단어가 본래 사회학적 용어였으나 일부 사람들과 그들의 생활양식에 적용할만하기 때문에 특정 민족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을까요? 아니면 이 둘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을까요? 저는 단지 이전 학자들이 한 이야기들을 반복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은 매우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독일의 저명한 학자들도 카일이 지적한 부분에 대해 의견을 피력했었지요.
섕크스: 빌[데버]이 카일에게 질문하겠다게 제게 속삭이네요. 그럼 한 번 들어보지요.
데버: 카일과 저 사이에는 적어도 약간의 견해 차이가 있습니다. 그나저나 우리는 함께 학교를 다니지 않았습니다. 저는 카일과 바룩 둘의 나이를 합친 것보다 더 나이를 먹었습니다.(웃음) 하지만 카일은 종교의 역할을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고, 그는 종교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탄생시켰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반대라고 주장합니다. 바로 이스라엘인들이 그들의 종교를 만들어낸 것이지요.
야훼종교가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민족적 동질감 같은 것이 형성되었을 것입니다. 이 과정이 반드시 종교적이었을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자꾸만 성경의 내용들을 생각하기 때문에 종교가 반드시 있어야할 요소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요. 유물을 다루는 고고학자이지만 동시에 성경본문을 존중하는 저로서는 이 산간지대 사람들이 가졌던 결속력은 주로 생존을 위한 사회, 경제적 성격의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야훼신앙은 그 이후에 그들의 경험을 설명하고 합리화하면서 등장하게 되었고, 성경본문과 마찬가지로 점차로 발전하고 진화해 나간 것이지요. 이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결국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하는 논쟁이지요. 이스라엘이 먼저입니까, 야훼종교가 먼저입니까? 근본적으로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하는 논쟁은 해결 불가능한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섕크스: 제가 이 질문을 먼저 한 후에 청중들께도 질문의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이스라엘인들의 대부분이 청동기후기의 도시문화권에서 왔다는 데에 동의하는 것 같습니다.
데버: 저는 도시문화권에서 왔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오히려 시골지역 출신이 더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가 동의하는 부분은 대부분은 초기 이스라엘인들, 또는 원-이스라엘인들은 토착 가나안인들이었다는 점입니다. 이들이 정확히 가나안 어디에서 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요단 동편도 역시 가나안의 일부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그들 중 일부가 요르단 계곡이나 요단 동편에서 왔다고 해도 결국 가나안 출신임에는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들이 토착민들이었다는 것은 오늘날 거의 모두가 인정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할퍼른: 그 예외적인 것이 있는데 바로 이스라엘인들이 외부에서 왔다는 전승입니다. 게다가 이스라엘의 초기 시가들에 외국인 혐오사상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제 결론은 분명 상당수의 이스라엘인들은 가나안 내부출신이지만, 결정적인 유입은 외부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이유들을 댈 수 있는데요, 그 중 하나는 특히 청동기후기 말엽 가나안에서 인력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빌이 철기 1기 중앙산간지대에 75,000명 정도가 살았다고 했는데, 저는 그 중 30,000에서 50,000정도의 인구가 외부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바로 제가 이 히브리인들이 시리아에서 내려왔다고 보는 이유입니다.
데버: 자, 문제가 있네요, 문제가 있어요. 자네들 둘 다 문제가 있어요. 만일 이스라엘인들이 요단동편 중앙과 남부에서 왔다고 주장하려면, 문제는 고고학적으로 이를 뒷받침할 증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헤스본, 디본과 같은 성경에 나오는 장소들에서마저 기원전 12세기이전, 그리고 기원전 11세기의 대부분 이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습니다. 요단동편 중앙과 남부에서의 수년간의 탐사와 발굴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에서는 고고학적으로 찾아낸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인들이 이 지역에서 왔을 수가 없지요. 그리고 중앙산간지대의 거주지들에서도 요단동편에서 넘어온 요소들의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이게 바로 이스라엘인들이 외부에서 왔다는 견해의 문제점입니다. 저도 그 견해에 동의하고 싶지만, 고고학적으로 이를 입증할 아무런 자료가 없습니다.
섕크스: 하지만 빌, 당신은 야훼신앙이 이 민족 집단들이 형성되기 이전, 청동기후기에 유다의 남동쪽에서 왔다는 카일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나요?
데버: 만일 종교적 전통을 그 지역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려면 차라리 철기 시대에 일어난 일로 보는 것이 쉽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가 사람들이 거주하던 때였거든요. 기원전 13세기에는 요단동편의 남부는 완전히 공백상태였습니다.
섕크스: 그런데 이 모든 사람들이 가나안 토착지역에서 산간지대로 몰려들었는데, 그들의 종교는 유다의 남동쪽에서 왔다는 것이 좀 이상하지 않나요?
데버: 나는 그들 모두가 가나안 토박이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모두가 그렇다고 말한 적이 없어요. 대부분이 그렇다고 말했지요. 야훼신앙은 아마도 중앙 팔레스틴의 외부에서 초기에 도입되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확히 어디서냐 하는 것은 고고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이지요.
맥카터: 빌, 당신이 방금 말한 요단동편이 공백상태였다는 데에 이의가 있습니다.
데버: 남부만 말입니다.
맥카터: 요단동편의 북부는 공백상태가 아니었지요?
데버: 그 말이 맞습니다.
맥카터: 저는 저 아래 헤자즈(Hejaz)지역에 대해 말한 것입니다. 후에 모압이 된 지역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니고, 훨씬 남쪽에 대해서 말한 것이지요. 거기는 공백상태가 아니었지요?
데버: 문제는 사우디 아라비아 지역에서는 고고학 발굴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맥카터: 소위 미디안 문화에 대해서는 어떠한가요?
데버: 최근에 도랑들을 파내긴 했지만... 우리가 가진 것은 도자기 전통들뿐입니다. 기원전 13, 12세기에 들어맞는 도자기 전통이지요.
맥카터: 실례지만 다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데버: 많은 사람들이 동쪽에서 왔을 것으로 생각하는 색칠된 도자기 전통이...
맥카터: 하지만 그렇다면 아마도 그 도자기를 만든 사람들이 있었겠지요?(웃음)
데버: 그렇습니다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올 만한 큰 거주지는 없었습니다. 물론 고고학적 주장들이란 증거가 없는 것이 증거가 될 수도 있고, 그러므로 훌륭한 고고학적 이론이 단지 도자기 파편 하나가 발견되어 확 뒤집힐 수도 있지요.
맥카터: 저는 단지 제가 마치 이스라엘인들이 그 곳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오해받지 않기를 바랬을 뿐입니다. 저는 이스라엘의 종교는 그 곳과의 접촉을 통해서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그 곳에 꼭 많은 사람이 거주했을 필요는 없지요.
데버: 별로 고고학적으로 흔적을 남기지 않는 유목민들이 이동하면서 그 곳에 머물렀을 수 있지요. 그리고 관념들도 그렇게 전해질 수 있구요. 전혀 문제가 없는 주장입니다.
섕크스: 빌, 당신이 말했던 철기 1기의 저수지들과 그 중요성에 대해 질문이 있는데요, 최근의 주장에 의하면, 저수지들은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있어왔고, 산간지대에서는 매우 적은 숫자의 저수지들이 발견된다고 하는데요. 사실 목깃이 달린 항아리는 우물에서 집까지 물을 나르기 위한 것이었잖습니까?
데버: 글쎄요, 그게 사실이라면 저는 요크의 대주교(the archbishop of York)입니다. 저는 절대로 이를 입증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 이전에도 저수지들이 있었으나, 절대로 흔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기술혁명의 일환으로 여겨지지도 않았구요. 그러나 철기시대 산간마을에서는 저수지가 절대적으로 필수적 요소였습니다. 물을 담아둘 시설이 없으면 산지에서 살아갈 수가 없지요. 그래서 그들은 초기 이스라엘의 마을들을 형성해가면서 발달된 형태의 저수지들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 이전에 저수지가 없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있었지요. 올브라이트는 이 점에서 틀렸습니다. 이 300여개의 거주지들에서 저수지가 없었다는 말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는 지표조사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발굴이 아니란 말이지요. 지표면을 걸어다니면서 저수지의 흔적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발견한다하더라도 그 연대를 측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직접 발굴을 해서 지층과 비교를 해 봐야 알 수 있는 것이지요. 라다나, 아이 같이 이미 발굴된 장소들에서는 저수지가 사용되었음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므로 산간지대에서 저수지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은 틀린 주장입니다.
목깃이 달린 저장용 단지들이 물을 길어오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은 가능한 이야기입니다만, 작은 나귀가 이 거대한 단지 두 개에 물을 가득 실어 등에 메고 온다는 것이 쉬운 일일까요? 물의 무게가 100킬로그램이나 나갈텐데요. 그러한 방식으로 물을 나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우물이 근처에 있고, 저수지가 있다면 이러한 방식이 필요하지 않았겠지요. 이 단지들은 아마도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이지만, 무언가를 옮기는 것보다는 저장하는 용도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섕크스: 자, 이제 청중들의 의견도 들어볼까요?
: 오늘 강연자께서 예로 보여주신 문서가 좀 혼란스러운데요, 좀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 오늘 본 것은 가나안 문서인데 마치 로마 글자처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이스라엘인들은 같은 가나안 땅에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는 기록체계를 만들어가고 있었단 말입니까? 그게 제 딜레마인데요.
맥카터: 알파벳은 오늘 우리가 말하던 지역에서 기원전 약 이천년대 중반에 발명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화면에서 보신 알파벳은 그 이전에 수 세기의 전통이 있었던 것이지요. 알파벳이 처음 고안되었을 때, 문자들은 소위 좌우교호서법(boustrophedon)이라고 불리는 방식으로 왼쪽에서 오른쪽, 그 다음 줄은 오른쪽에서 왼쪽, 또는 위에서 아래로 등 자유롭게 기록되었습니다. 이즈벳 사르타에서 발견된 이 알파벳 문서가 발견되었을 당시에는 보시다시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기록할 수도 있었습니다. 물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기록하는 것도 가능했었지요.
: 히브리어 알파벳하고는 어떠한 상관이 있습니까?
맥카터: 모든 알파벳은 기원전 약 이천년대 중반에 시리아-팔레스틴 지역에서 발명된 알파벳의 후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즈벳 사르타에서 나온 오스트라콘(도자기 파편에 글을 쓴 것)은 소위 고(古)가나안 알파벳으로, 알파벳의 가장 초기형태입니다. 별로 많은 기록들이 전해오지 않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것보다는 더 복잡했을 것입니다. 철기 시대, 보다 구체적으로 철기 2기에 들어서면... 기원전 일천년대에 들어서면, 이스라엘, 모압, 암몬, 블레셋, 페니키아 등 국가들이 형성되게 되는데, 이 국가들은 알파벳을 자신들의 국가의 글자체로 특성화시키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마치 그들의 언어가 그들 고유의 언어로 발전하고, 그들의 종교가 국가의 신을 섬기는 국가적 종교로 발전했듯이 말입니다. 그 당시 히브리어 알파벳도 고유의 형태로 발전했으나, 이즈벳 사르타의 것은 히브리어 문자인지 아니면 페니키아 문자인지를 구별하기엔 너무 이릅니다. 단순히 북서셈어 알파벳이라고 부르는 것이 낫겠습니다. 사실 텔 게제르(Tell Gezer)에서 발견된 그 유명한 기원전 10세기의 게제르 달력도 히브리어 비문으로 여겨져 왔지만, 이를 히브리어 알파벳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너무 이르기 때문이지요. 기원전 10세기는 아직 이것이 다른 나라들의 문자와 확연히 구별되는 히브리어 문자라고 하기엔 너무 이릅니다.
: 데버 교수님, 교수님께서는 원-이스라엘인들이 메르넵타 석비가 기록될 당시까지 약 300여개의 대가족 중심의 거주지의 형태로 정착을 했다고 주장하신 것 같은데요, 어떻게 그들이 이스라엘인인지 알 수 있을까요?
데버: 아주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두 가지를 제시하겠습니다. 첫째는 그 당시까지 거슬러 가는 성경본문전통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이 원-이스라엘은 나중에 왕정시대의 “모든” 이스라엘과 동일한 것이 아님을 저는 강조했습니다. 이들은 후대 이스라엘인들의 선조격이라고 ...
: 그러면 이집트의 서기관이 메르넵타 석비에 “이스라엘은 멸망했고, 그들의 후손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고 기록했을 때,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을 염두에 둔 것입니까?
데버: 그게 두 번째 것입니다. 바로 메르넵타 석비이지요. 이스라엘을 언급하는 메르넵타 석비가 없었다면 제가 그러한 민족적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오래전에 기록된 성경본문이 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다행히도 우리는 이 석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집트 학자들과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그 의미를 분명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이 말하듯이 그 비문은 판독하기 어렵다거나, 이스라엘이란 언급이 어디에 나타나는지 모른다는 등의 주장은 우스운 것입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연대도 분명하지요. 천문학적으로도 확정되었구요. 그러므로 이 석비는 우리로 하여금 이 산간지대의 사람들을 이스라엘 또는 원-이스라엘이라고 부를 수 있게 해 주는 한없이 소중한 증거입니다.
: 그렇게 이른 시기에 그들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고, 그들 스스로도 자신들을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불렀다는 말씀이신가요?
데버: 바로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일종의 보증인 셈이죠. 만일 그들이 자신들을 이스라엘인들이라고 불렀다면, 우리도 그렇게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 제 말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그 밖에 어떠한 다른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명칭은 아주 흔한 것은 아니었지요?
데버: 흔한 명칭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집트인들이 그들을 알고, 또 그러한 명칭으로 부를 만큼 정도는 알려져 있던 이름입니다. 우리는 이집트의 기록들을 통하여 그들이 팔레스틴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스라엘”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데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를 인용부호를 사용하여 표현하는데, 그 이유는 더 확실한 증거들이 나올 때까지 좀 더 신중을 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고고학 연구들로부터 증거들이 속속 나오고 있습니다.
: 데버 교수님께 다시 질문인데요, 만일 메르넵타 석비 당시에 이스라엘이 단지 산지 사람들의 모임이었다면, 왜 이집트의 위대한 왕인 메르넵타가 공들여서 “이스라엘의 후손은 멸망했다”고 기록을 했는지 의문입니다. 아마도 이스라엘에게는 당시 이집트의 파라오가 강조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파라오가 그들을 멸망시켰다고 말할 만큼 말이지요.
: 제 두 번째 질문은 오늘 강연자들 모두가 기존의 연대를 받아들이는 것 같은데요, 기존의 연대에 대한 학문적 혼란은 없습니까? 의문이 제기되고 있나요?
데버: 둘 다 좋은 질문들입니다. 후자의 질문의 경우, 역사가들 사이에 약간의 논쟁이 있습니다. 특히 이집트 학자들과 팔레스틴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20년 이상의 오차는 없습니다. 그래서 메르넵타 석비가 기원전 1230년경의 것으로 여겨져왔던 것입니다. 오늘날은 기원전 1207년으로 보고 있지요. 20년의 오차는 별로 큰 것이 아닙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오차를 20년의 미만으로 줄였지요. 그 이상의 연대에 관한 문제는 없습니다. 그 정도로 정확하게 연대를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연대의 문제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며, 우리의 논의에 있어서 큰 차이점을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첫 번째 질문은 석비의 비문에 관한 것인데요, 우리는 오늘 그 석비의 비문 전체를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다 읽었어야 했지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이 비문에서 정복당한 유일한 국가가 아니라, 여럿 중의 하나이니까요. 전체 비문에서 이에 관련된 부분은 이렇습니다.
“가나안은 약탈당하고 각종 재난을 맞이하였다.
아스겔론(Ashkelon)은 정복되었다.
게제르(Gezer)는 함락되었다.
야노암(Yanoam)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황폐해졌다. 이스라엘의 후예는 이제 없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만 특별히 언급된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이지요.
할퍼른: 제 의견은 다른데요, 왜냐하면 조금 전에 읽지 않은 부분 중에 바로 이어지는 내용이 “후루(Hurru)는 이집트에게 과부가 되었다”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이스라엘은 황폐해졌다. 이스라엘의 후예는 이제 없다”는 내용과 대구를 이루고 있지요. 수태를 시킬 이스라엘이 없어졌으므로, 후루가 이집트에게 과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후루는 가나안을 가리키는 일반적 용어입니다. 이는 많은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의 산간지대에 들어가서 그 지역을 풍성하게 하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이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명칭에 붙은 한정사가 다르다는 점에서도 이스라엘은 이 비문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이 여기에 언급된 다른 국가들보다 더 정치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일반적이지 않은, 의외의 현상일 뿐이지요.
섕크스: 바룩, 내가 질문하신 분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그 분이 알고 싶으신 것은 왜 겨우 시골의 농사꾼들이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그렇게 중요했느냐는 것인데요?
할퍼른: 왜냐하면 파라오가 그들을 정복할 수 있었으니까요.(웃음)
데버: 샤수도 언급되었습니다. 왜 요단동편의 별 볼일 없는 양치기들이 언급되고 있냐구요? 그런데 이집트인들은 그들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또 하나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어느 비문이든 그 비문에 적힌 말들의 역사성에 대해 의심을 할 수 있습니다. 아마 메르넵타 비문도 전형적인 이집트인들의 자랑섞인 허풍이거나, 아니면 진짜이거나 둘 중 하나겠지요. 예를 들어 게제르에서 파괴의 지층을 찾아냈습니다. 성경에는 이스라엘인들, 아니면 시피플, 아니면 블레셋인들이 게제르를 파괴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몇 해 전에 우리는 메르넵타는 자랑으로 허풍을 떠는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을 찾아서 학술지에 발표했습니다. 실제로 게제르는 기원전 1200년 이전에 파괴되었습니다. 아스겔론에서도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데요, 발굴자인 래리 스테이거(Larry Stager)는 메르넵타가 파괴한 흔적을 찾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아마도 메르넵타 비문은 단지 허풍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할퍼른: 맞습니다. 아스겔론에는 이에 대한 증거가 분명 있지요.
: 강연자 여러분들 모두께 질문이 있습니다. 일부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은 그들이 이스라엘인들, 즉 히브리인들 이전에 가나안에 있던 사람들의 후손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영토, 또는 팔레스틴 땅에 대한 소유권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연구가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지, 아니면 이 주장에 상반되는지, 아니면 이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데버: 이러다가 비행기 놓치겠는데요.(웃음) 기본적으로 우리는 골동품 수집가와 마찬가지입니다. 현대 중동의 문제에는 전문가들이 아니지요. 저는 그 곳에서 12년을 살았습니다. 거의 아는 것이 없다고 봐야지요. 하지만 그 곳에 3주간 여행을 다녀온 사람에게 물어보세요. 모르는 게 없을 것입니다.(웃음) 아니면 부시 대통령한테 물어보시던가요. 그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던데요.(웃음) 하지만 이는 모두 사실이 아닙니다. 농담조로 말하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늘날 그 지역의 사람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 문화적, 민족적, 인종적으로 혼합되어버렸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러한 역사적 주장을 한다면 이는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할퍼른: 그 땅에 누구보다도 먼저 존재했었다고 감히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크로마뇽인들밖에 없습니다.(웃음) 그 이후, 빌이 말한 과정이 시작될 때 쯤 그들은 네안데르탈인들과 혼인을 통해 섞여버렸지요.
맥카터: 기억해야 할 것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이스람 사람들도 아브라함 이야기와 연관된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둘의 주장이 모두 아브라함 전승에 바탕을 두고 있지요. 이게 바로 종교적 전승의 특징입니다. 우리가 연구는 할 수 있지만, 그 가치를 평가하거나 어느 편을 들 수는 없는 것이지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 보다 더 과격한 주장을 할 때 그들이 종종 내세우는 것은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이슬람도 아브라함 종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팔레스타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이스마엘에게 속한 그 땅에 대한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확고한 권리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들도 이삭과 야곱에게 속한 그 땅에 대한 권리가 있는 것이지요. 이는 여러분들이 깨닫고 존중해 줄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오랜 전통의 권리를 가지고 서로의 전통을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이는 그 지역의 상황이 얼마나 해결하기 어렵고, 왜 그렇게 서로간의 갈등의 골이 깊으며, 서로의 입장이 그렇게 진지한지 여러분의 이해를 좀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데버: 고고학에 대해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불행히도 고고학은 중동의 정치적 분쟁과 연관되기 일쑤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이를 피하려고 노력합니다. 특히 이스라엘과 요르단 모두에서 일하는 우리 미국인들은 더욱 그렇지요. 제 제자들도 이스라엘과 요르단 모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무척 조심스럽습니다. 고고학적 증거들을 민족적 이익을 위하여 남용하기 쉬우나, 이는 무척 위험한 발상입니다. 민족주의와 종교의 조합, 고고학을 위해서 중동에서 펼치는 극단주의.... 아, 나치가 고고학의 이름으로 행한 일을 생각해보세요. 극단적 문화우월주의 말입니다. 모두 아주 위험한 사상들입니다.
섕크스: 자, 마지막 질문입니다. 말씀하세요.
: 지난 10년간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오늘의 주제에 대한 책을 읽었는데, 그 책은 아브라함이 역사적 인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교수님은 이브림(ivrim)은 히브리라는 말의 어원이 아니고, “건너서, 저쪽에서 온”을 의미하는 에베르가 어원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이 단어가 발음상 비슷한 아브라함하고 관련이 있습니까?
맥카터: 비록 영어로 아브라함과 에베르는 발음상 비슷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아주 다른 단어들입니다. 고대의 히브리어에서는 완전히 다른 자음들로 구성되어 있는 단어들이지요.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히브리하고는 관련이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섕크스: 여러분은 아주 훌륭한 청중이었습니다. 오늘 하루 종일 저희와 함께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들도 저희만큼 오늘의 시간이 즐거우셨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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