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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일지 1892-1934

미 여선교사가 목격한 한국근대사 42년간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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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서명 : THE JOURNALS OF MATTIE WILCOX

매티 윌콕스 노블

강선미,이양주 역자

이마고

2010년 02월 22일 출간

ISBN 9788990429858

품목정보 152*225mm35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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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91주년을 맞는 3·1절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뜻 깊은 책 《노블일지 1892~1934》가 출간되었다.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
기까지 42년간 이 땅에서 살다간 미국인 여선교사 매티 윌콕스 노블 여사는 매일매일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일지로 기록하였다.
이 육필 일지는 그녀의 사후 유족들에 의해 보관되다가 80년대 후반에야 문서로 정리되었으며, 90년대에 국내 일부 기독교계와
사학자들에 의해 연구·소개되었으나 책으로 번역 출간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꽃다운 스물 살의 나이에 갓 결혼한 새신부가 코리아라는 머나먼 낯선 땅에 선교사로 부임하여, 복음이라고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이없는 이들을 열성적으로 전도하고, 칠남매를 낳아 기르고(그중 둘은 아기 때 숨져 평양에 묻힌다), 병들고 가난한 이웃들을 돕
고, 차별받는 여성과 어린이들을 가르치다가 환갑이 넘어 미국으로 돌아가 운명을 맞이하는 지난한 여정은 그 자체로 지난 세기
범상치 않은 한 여성의 삶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우리가 《노블일지》를 주목하는 것은 단순한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는 그 역사적기록으로서의 가치 때문이다.

3·1운동, 그때 그곳의 생생한 모습
《노블일지》에서 가장 압권이자 그 사료로서의 의의를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이 3·1운동에 대한 생생한 관찰과 묘사다. 1919년
3월 1일 노블 여사는 사방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기쁨에 찬 만세 소리에 깜짝 놀란다.
“오늘은 한국의 위대한 날이다. 한국인들의 기쁨이 얼마나 이어질 수 있을까? 오후 2시, 중학교를 비롯한 각급 학교들이 일본의
한국지배에 항거하는 시위를 벌였고, 거리로 나가 양손을 위로 올리고 모자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하기 시
작했다. 거리의 사람들 역시 이 대열에 합류했고, 도시 전역에 기쁨의 외침 소리들이 울려 퍼졌다. 나는 긴 행렬 하나가 궁궐[덕
수궁] 담장의 모서리를 지나는 광경을 우리집 창문을 통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만세의 환희는 곧 일본 경찰과 헌병들의 잔혹
한 탄압으로 이어진다. “오늘 아침 9시에 남녀 학생들이 인파가 모여 있던 남대문 역전에서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해방가를
불렀다. ……학생들이 이동을 하여 덕수궁 앞에 다다르자 경찰들이 진압에 들어갔다. 사복 차림의 이들이 가게에서 쏟아져 나와
서는 몽둥이로 학생들을 때리기 시작했다. 많은 학생들이 무자비하게 구타당했다. 이화학당의 한 여학생이 몽둥이로 등을 맞는
것을 보고 우리 비서인 김봉율 군이 다가가 말리려 했다. 그러자 신분을 위장한 경찰로 의심되는 사복 차림의 일본인들이 김봉율
군을 때리기 시작했다. 그의 머리를 때린 몽둥이가 세 동강으로 부러지자 그들은 그의 목을 주먹으로 때리고 고개를 뒤로 꺾어서
는 감옥에 집어넣었다.”(1919년 3월 5일자)
“어제 저녁 일요일, 서울 서부의 몇몇 동네와 종로에서 동대문에 이르는 서울 시가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한국의 독립을 외치는
데모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경찰과 헌병들에 의해 베임을 당했고, 몇몇은 죽임을 당했다. 토요일 아침에는 다섯 명이 살해됐다.
”(1919년 3월 24일자) “평양에 있는 우리 기홀병원과 서울의 세브란스 병원에는 처참하게 칼로 베어진 환자들이 매일 이송되고 있
다. …… 현재 병원의 병실과 복도는 부상자로 득실거린다. 어제 세브란스에서 60장의 침대 시트와 많은 붕대를 요청하는 비상전
화가 왔다. …… 그들은 맨손으로 단지 ‘자유, 우리에게 자유를!’을 외쳤던 사람들이다.”(1919년 3월 28일자)
“요즘은 밤에 한국인이 거리를 걷기만 해도 경찰에게 매를 맞는다. …… 어젯밤 거리를 걷던 사람들은 만세를 부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세 명이 살해됐으며 많은 사람들이 다쳤다.”(1919년 3월 30일자) “3월 31일 저녁 한 한국인 남성이 시골에서 올라와 남대
문에서 기차를 내려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정부에 고용된 소위 일본 재향군인들(순전한 악당들)에게 잡혀서 매를 맞았다.
어떠한 구실도 없었다. 다만 공포체제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그 남자는 너무 심하게 맞아서 밤사이에 죽었다. 이것은 하나의 예외
적사건이 아니다. 이러한 경우가 수도 없이 많고 증거도 확실하다.”(1919년 4월 2일자)
노블 여사는 시위를 하다 붙잡힌 이들이 겪은 심문과 고문, 감옥의 열악한 환경과 불공평한 재판 과정 등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것은 일본 경찰들이 여학생들을 벌거벗겨 고문하는 장면이다.
“경찰서에서 그들은 몸수색을 위해 옷을 벗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것은 굴욕감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잠시라도 머뭇거리면 금
줄 세 개를 단 네다섯 명의 남자들로부터 매를 맞았다. 감옥에서도 그들은 벌거벗겨진 채 지내며 간부들의 사무실로 불려가서 심
문을 당하고 매를 맞았으며, 다시 알몸으로 감방으로 돌아와야 했다. …… 감옥에 아직도 남아 있는 두 소녀는 고문을 당해야 했다
(출옥한 소녀들의 증언이다). 한 소녀는 양쪽 엄지손가락을 한데 묶여 매달렸다. 다른 소녀는 이화학당에서 가장 총명하고 예쁜
여학생으로 진남포에서 내가 시작한 최초의 여학교 출신인 박인덕이다. 그녀는 옷을 벗기우고 심한 채찍질을 당했다. 그녀는 또한
무릎을 꿇고 앉아 무거운 의자를 들고 있어야 하는 고문도 당했다. 만일 떨려서 손이 내려오면 팔을 맞아야 했다.”(1919년 3월 28일
자) 《노블일지》는 이러한 공포 분위기에서도 용감하게 진행된 한국인들의 동맹파업과 동맹휴교, 일본 상품들에 대한 불매운동
등 당시서울의 모습과 항일운동의 전개 양상을 세밀히 그리고 있다.

제암리 학살사건에 대한 새로운 증언
3월 1일 이후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진 만세시위가 특히 활발했던 곳이 수원 일대였다. 일본군은 기독교와 천도교 세력이 배후에 있
다고 보고, 이에 대한 계획적 토벌의 일환으로 1919년 4월 15일 제암리와 고주리의 예배당에 신자들을 모으고 총살한 뒤 불태운다.
이것이 바로 ‘제암리 학살사건’이라고 알려진 사건의 개요다. 하지만 당시 수원 지역 감리사였던 남편과 함께 직접 학살 현장을 둘
러보고 생존자들을 만나 증언을 들은 노블 여사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일본군의 방화와 살육이 더 폭넓은 지역에서 이루어졌으며
희생자도 알려진 29인보다 훨씬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먼저 노블 여사는 사건의 발단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최근 일본정부는 소위 ‘역도들’을 제압할 수 있는 더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했다고 한다. 우리는 맨손으로 단순히 ‘독립 만세’를 외
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더 가혹할 수 있을지에 대해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보병대 2사단, 포병대 1사단, 기병대 2사단이 일본
으로부터 파병되고 난 후 우리가 처음 알게 된 사실은 마을들이 불타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특정 마을들이
불타버렸다는 결정적 소식은 그곳에서 서울로 도피해온 사람들에 의해 전해졌다.”(1919년 4월 2일자)
당시 미 부영사를 위시한 선교사들이 제암리의 피해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방문했을 때 “그들은 실상이 전해들은 그 어떠한 소문들
보다도 훨씬 참혹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들은 재가 되어버린 교회와 숯덩이가 된 시신들을 보았으며, 살이 타면서 나는 냄새를
맡고 병이 날 지경이었다. 곡물 창고와 가축들도 모두 불에 탔다. 군인들은 가정을 방문하면서 남자들을 교회로 모이라고 했는데,
그들이 다 모이자 교회에 불을 붙이고 안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살라버렸다. 누군가 도망을 치려고 하면 그들은 총으로 쏴 죽였다
. 남편들이 어떻게 됐는지 교회로 보러 왔던 두 여성이 있었는데, 하나는 19세였고 다른 하나는 42세였다. 군인들은 그들도 총살했
다. 나중에 아들이 죽은 한 여자가 군인에게 다가가서 자신도 죽여 달라고 하자 그는 그 자리에서 그녀를 총살했다.” 학살과 방화는
제암리에서만 행해진 것이 아니었다. 조사단은 “다른 다섯 마을의 상황이 시체들을 매장한 것만 빼고는 위에서 이야기한 제암리의
상황과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 그들은 그 지역에서 전멸된 열여섯 마을을 알아냈다.” 《노블일지》에는 남양리, 화수리,
경대리, 아찬리 등의 구체적 피해 지역이 명시되어 있으며, 학살이 교인 남성들만이 아니라 마을주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행해
졌음을 밝히고 있다(“그곳[제암리]에서 2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는 어느 집의 경우에는 그때의 사건으로 노인과 아들 셋, 손자
셋과 며느리 한 명이 죽었다. 한 집에서 여덟 명이나 희생된 것이다.”- 1919년 7월 12일자). 당시에는 매장을 하려면 일본 측의 허가
를 받아야 했는데, 사인에 자상이나 총상이라고 적으면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매장에 대한 인가를 받기 위해 ‘자연
사’라고 써야 했다.”(1919년 4월 2일자) 이렇듯 억울한 ‘자연사’가 얼마나 많았는지는 앞으로 더 조사되어야 할 부분이다.
한편 남편 아서 노블이 하세가와 총독을 찾아가 교회를 방화한 것에 대해 따지자 “하세가와 총독은 재건축을 위해 한 건물당 500엔
을 보상하겠다고 약속하면서 그 사실을 알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1919년 5월 15일자)고 한다. 사건을 축소 은폐하려는 일제
의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한국근대사의 압축적 증언 : 동학혁명에서 광주학생운동까지
《노블일지》는 노블 여사 자신의 목격담이나 교인들의 단편적 전언, 당시의 풍문들을 통해 한국근대사의 주요 사건들을 직간접적
으로 전달하기도 한다. 그것은 동학군의 북상에 따른 외국인들에 대한 테러 소문(1893년 5월 17일자)에서부터 청일전쟁과 갑오개
혁으로 이어진 일본군의 경복궁 습격 사건(1894년 7월 23일자), 1904년 4월 15일 일어난 덕수궁의 화재, 광주에서 시작된 거국적 학
생운동의 하나로 1929년 12월에서 1930년 1월 사이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에서 벌어진 만세시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중 특기
할 만한 것을 몇 가지 들면 다음과 같다.
1904년 2월의 일지에서 노블 여사는 러일전쟁의 발발로 피난을 떠나는 평양 시민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의 정황을
알려주는 보기 드문 자료다.
“일본 영사가 시내의 주요 대문들에 방을 붙였다. ‘평양에 4~5만 명의 군인들이 들이닥쳐 주둔을 할 터인데, 이들로부터 여성들을
보호해줄 수 없으니 모든 젊은 한국인 부녀자들은 서둘러 집에서 나와 산이나 먼 곳으로 피해 있으라.’라는 내용이었다. 젊은 부녀
자들이 피신을 하니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몇몇 남자들과 나이든 여자들도 아기를 업고 짐들을 지고 따라갔다. 아침부터 밤까지 각
종 살림살이들을 보따리에 싼 이들이 평양의 주요 대문들 밖으로 쏟아져 나갔는데, 그러한 피난 행렬이 며칠 동안 이어졌다. ……
등에 매달린 아기들, 지팡이에 의지해 가는 노인들, 옷가지며 가재도구들을 천에 싸서 머리에 인 이들, 머리와 손에 짐을 이고지고
부모나 조부모 옆에서 뛰어가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은 참으로 딱한 광경이었다.”
한편 1919년 3월 2일자의 기록은 3·1운동 당시 고종 독살설이 얼마나 시중에 팽배해 있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일본과 한국은 함께 움직일 때 더욱 발전할 수 있으며,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분리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내용의 문서에 거의 강제
적으로 서명이 이루어졌다. 고종 황제가 이에 격노하며 서명하기를 거부하자, 강제적으로 서명을 받아낸 이들은 그에 따른 파장이
두려워 고종 황제를 독살하고 궁녀들도 살해했다. 바로 윤덕영과 호상학[당시 전의였던 안상호]의 짓이었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
를 담은문서에 이완용, 조중응, 김윤식, 송병준, 임태영, 신흥우가 서명을 했고, 그 내용을 담은 전단이 온 거리에 뿌려졌다.”
《노블일지》는 러일전쟁 이후 한일병합 때까지 일본군의 강압적인 수탈과 폭력이 어떻게 자행되었는지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밝히고 있다. 그중 가장 황당하고 분노할 만한 것이 1908년 6월 16일 노블 여사의 평양 집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난데없이 노블 여
사 집에 들이닥친 일본 군인에게 한국인 관리인이 나가 달라고 하자 일본군은 그를 구타하고 칼을 휘둘러 죽이려 한다. “우리가 식
당으로 들어서는 순간 위쪽에서 일격을 가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군인이 칼로 관리인 정 씨를 베었는데, 관자놀이 위쪽으로 3센티
미터 정도 되는 상처는 뼈까지 드러날 정도였다. 그 즉시 두 명 다 아래층으로 내달렸는데, 정 씨의 머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고,
옷은 피범벅이 되어 있었으며, 그가 지나가는 곳마다 핏방울이 떨어졌다.” 노블 여사가 이를 말리자 일본 군인은 황급히 도망치고
만다. 노블 여사는 이 일을 끝까지 따져 급기야 그 일본 군인을 체포하게 하고 일본 헌병대장과 평양 지사에게 사과를 받아내지만
자기 집에서 일는 사람조차 제대로 지켜낼 수 없는 현실에 자괴감을 느낀다. “사람들은 올드블랙조[정 씨]가 나에게 너무도 고마워
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1908년 6월 18일자) 외국인의 비호를 받는데도
이 지경이었으니 그렇지 못했던 얼마나 많은 이들이 억울하게 빼앗기고 죽어갔을까?

근대 여성사·생활사 연구의 귀중한 참고자료
《노블일지》는 기본적으로 선교사의 기록으로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기독교를 전도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그 과정에
서 노블 여사는 당시 열악했던 한국 여성들의 처지를 목격하게 되었고, 같은 여성으로서 연민 어린 눈으로 그들의 실상을 보고하고
있다. 남녀내외의 엄격한 관습에 따라 문밖출입도 자유롭게 할 수 없고 다른 남정네에게 들릴까봐 목소리도 크게 낼 수 없으며, 조
혼과 축첩, 남편의 폭력과 시어머니의 학대가 예사이며, 같은 병에 걸려도 여자아이라는 이유로 치료도 하지 않고 방치해 죽이고,
과부가 되면 아무나 보쌈을 해가고, 부정을 저지르면 코나 손가락을 자르는 만행도 서슴지 않는다. 그녀가 목도한 이러한 광경이
불과 100년 전 이 땅의 모든 여성이 처한 엄연한 현실이었다.
노블 여사가 주도한 여성성경공부모임이 그토록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당시 가장 억압받고 소외당하던 이들에게 그것이 너무나
절실한 해방구처럼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름도 없이 그저 ‘첫째’ ‘가운데’ ‘막내’ 등으로 불리다가 결혼하면 누구누구의 처, 자
식을 낳으면 아무개의 어멈으로 불리던 여성들이 세례명이라는 자기만의 이름을 얻게 되었을 때, 딸이라는 이유로 가르치지도 않
아 글도 못 읽던 이들이 드디어 성경 구절을 혼자서 읽을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들이 느꼈을 벅찬 기쁨과 자유, 감사의 마음을 우리
가 감히 헤아릴 수 있을까. 자신의 머리카락을 팔아 딸을 교육시키려는 가난한 어머니, 자신이 소 먹이는 부업을 해서라도 며느리
를 공부시키려는 시어머니의 이야기는 그런 우리 할머니 세대의 배움에 대한 한을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또한 노블 여사는 여성 특유의 섬세한 관찰력과 인류학자와도 같은 호기심으로 자신이 접한 생경한 한국 문화와 풍속의 여러 단면
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당시 여러 가옥의 구조에서 각종 음식과 복식, 결혼식과 장례식의 세부 절차와 격식, 널뛰기나 돌싸움 같
은 명절놀이, 귀신을 섬기는 각종 미신과 무당의 굿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근대 생활상과 풍속을 소개하고 있다.
《노블일지》는 우리 근대사 연구의 중요 사료일 뿐 아니라 여성사와 생활사를 연구하는 이들에게도 귀중한 참고자료가 되어줄 것
이다.

목차

옮긴이의 글_어느 미국인 여선교사의 한국 생활 42년
머리말

제1권 1892-1896 태평양을 건너 코리아로
제2권 1896~1905 피난을 떠나는 사람들
제3권 1904~1910 빼앗긴 땅의 슬픔
제4권 1911-1919 그날의 만세 소리
제5권 1919-1925 불타버린 마을에서
제6권 1927-1934 승리의 생활

옮긴이 주
매티 윌콕스 노블
매티 윌콕스 노블 Mattie Wilcox Noble(1872~1956) 매티 노블의 일기에는 기존의 선교관련 서적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엄정함과 깔끔함보다는 인간 냄새 폴폴나는 여성 특유의 세심함 이 묻어난다. 사역에 대한 보고 형식의 일기는 물론, 사랑해야 할 조선인들과 티격태격 씨름하며 배앓이하는 모습, 복음을 받아들 이며 변화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환희와 소망으로 뛰노는 장면, 당시의 조선 사람의 관습을 외국인 선교사의 입장에서 자세 히 풀어 전한 부분, 정치적 중립을 지킬 수밖에 없던 선교사로서 조선독립 운동을 심정적으로 지원하는 부분, 성경 중심의 분명한 사역 원칙이 있었지만 사람들의 연약함과 풍습을 이해하고 기다려주는 모습 등 단지 한 명의 뛰어난 선교사라기보다는 어머니와 같았던 그녀의 모습 속에서 어미닭의 포근함을 연상하게 된다. 그녀는 1872년 펜실베니아 주 윌크스베러에서 태어났다. 와이오밍 신학교에서 만난 윌리엄 아더 노블과 1892년 결혼했고, 그 해에 한국 선교사로 부임하는 남편을 따라 내한했다. 서울, 평양, 수원 등지에서 감리사로 오랫동안 일한 남편을 도와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선교와 교육사업에 힘썼다. 특히 평양 남산현교회를 중심으로 한국 최초의 여성성경공부모임, 한국 최초의 유년 주일학교를 시 작했다. 1934년 은퇴한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1941년 북 캘리포니아 주를 대표하는 ‘미국의 어머니’로 뽑혔다. 남편은 1945년 캘리포니아 주 스톡턴에서 사망했고, 노블 여사는 1956년 스톡턴의 한 요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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