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정판] 믿음의 여인들 1
기엔 카젠 | 생명의말씀사
16,000 14,400원
성경속 여성들이 말하다
셰넌 브림 | 새롭게하는사람들
15,000 13,500원
열두 제자 이야기
이진경(2) | KMC(도)
15,000 13,500원
[개정판] 믿음의 여인들 2
기엔 카젠 | 생명의말씀사
17,000 15,300원
말씀 앞에 서는 용기 - 신약 인물의 실패에서 배우다
한주원(1) | 이레서원
15,000 13,500원
뵈뵈를 찾아서
진 다니엘스 | 비아토르
17,000 15,300원
성경의 인물 83인
방영철 | 나눔사(도)
17,000 15,300원
요나뎐
다니엘 오(2) | 새벽별
17,000 15,300원
사막이 되어 가는 세상에서
이지현(5) | 쿰란출판사
13,000 11,700원
예수의 피를 힘입어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최관호 | 예영커뮤니케이션
31,000 27,900원
바울의 동역자들
오광석(3) | 좋은미래
18,000 16,200원
다윗의 숨겨진 전설
한홍 | 규장
22,000 19,800원
예수님을 만난 신약의 사람들
조영민 | 죠이북스
15,000 13,500원
삼손 X-파일
이홍길 | 세움북스
13,000 11,700원
다니엘과 세친구 그리고 요엘 아모스
장재명 | 열린서원
25,000 22,500원
하나님의 선한 도구, 바나바의 성품으로
‘전도의 미련한 것’의 실례를 배우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살아있는 표본을 살피다.
우리는 왜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라고 하는 것일까? 사람은 정말 변하지 않는 존재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사람은 변할 수 있다. 사람은 분명히 고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렇게 말하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에게는 그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마가를 볼 때, 베드로를 볼 때, 그리고 바울을 볼 때, 하나님은 사람을 고쳐서 쓰신다! 물론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직접 나서서 고쳐 쓰셨다. 하지만 마가의 인생을 볼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바나바를 어린 시절부터 붙여주시는 방법을 쓰셨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하나님은 바나바를 통하여 마가를 고쳐 쓰셨다. 바울의 경우에는 다메섹 도상(道上)에서 그를 부르신 뒤, 바나바를 통해 ‘사역의 장(場)’을 열어주셨다. 당연히 바나바의 사후(死後), 마가를 양자로 맞아들인 베드로는 달라진 마가의 모습에서 ‘바나바의 그림자’를 느꼈을 것이다. 마가는 분명히 예루살렘에서 본 마가가 아니었을 것이다. 예루살렘 한가운데 위치한 대저택을 소유한 집안의 아들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에서 베드로는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베드로가 마가를 양자로 맞아들인 곳은 ‘선교의 최전선인 로마’였다. 그런 점에서, 바나바는 ‘마가와 바울 그리고 베드로’에게 선(善)한 영향력을 끼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마가와 바울 그리고 베드로’를 고쳐 쓰신 ‘하나님의 선(善)한 도구’였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을 읽는 가운데, ‘마태와 마가의 세상’이 ‘독자들의 세상’과 만나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한다. 이 책을 읽는 가운데, ‘마태와 마가의 인생’이 ‘독자들의 인생’과 ‘하나님의 은혜’로 연결되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하며, 다섯 번째 책을 세상에 내보낸다.”
이 책에는 ‘마태와 마가의 세상’이, ‘마태와 마가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있다. 우리 인생은 ‘마태와 마가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일까? 아니면, ‘마태와 마가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동일하게 받아 오늘도 분투하는 인생’일까? 어느 쪽인들 무슨 상관이 있으랴! 양쪽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인생이 아니던가!
서문ㆍ6
1부 마태
랍비를 꿈꿨던 소년ㆍ14
예수님의 여섯 번째 제자ㆍ39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ㆍ 66
마태는 어떻게 ‘유대인을 위한’
가장 ‘반유대적’인 복음서를 썼을까?ㆍ91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에서 복음을 전할 때 기록된 마태복음ㆍ123
2부 마가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ㆍ 148
바울이 바나바에게
이런 주장을 할 처지가 아니지 않나?ㆍ177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ㆍ214
바나바와 베드로 그리고 바울의 면류관ㆍ241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칼빈은 ‘성령 하나님의 내적 은밀한 역사’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증거’로 내세웠다. 무슨 말인가? ‘성령 하나님의 내적 은밀한 역사’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이다. 즉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만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할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인간 저자를 당신의 동역자 삼아 주셨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신다. 하나님의 형상인 당신의 사람이 없이는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키지 않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즉 성경을 기록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을 동역자 삼으셨다. 그러므로 “성경은 100% 하나님의 작품인 동시에 100% 사람의 작품이다.” 그 결과 “성경은 참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때 동역자 삼으셨다는 것은 단순히 인간 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쓰기했다는 것이 아니다. ‘인간 저자의 성품과 인생 경험’이 오롯이 성경 말씀 가운데 녹아들어 있다는 이야기다. 심지어 그 시대의 아들딸일 수밖에 없는 인간 저자의 특성마저 성경 말씀 가운데 녹아들어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오류(誤謬)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위대하심이고 하나님의 은혜’다. 이 모든 것은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하나님이시기에 가능한 일이다.
p. 21~22
마태복음은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다. 즉 마태복음에는 온 우주의 주인이신 ‘왕의 귀환’이 그려져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돌아오신 왕’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예수님이 오실 ‘그 메시아’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었을까? 우리 대한민국에도 자신을 가리켜 ‘그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미친놈’들이 있다. 자신이 ‘예수’라고 주장하는 인간들이 있다. 그 숫자는 대충 69명에서 70명대 초반에 달한다는 말이 있다. 이렇게 숫자가 변하는 이유는 해마다 죽는 ‘자칭(自稱) 예수’와 새롭게 자신을 ‘예수’라고 주장하는 이단(異端)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스스로를 가리켜 ‘예수’라 주장하는 그들은 결코 ‘그 메시아’일 수가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구약성경’에 예언한 말씀을 성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언약 백성은 ‘그 메시아’를 ‘구약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성취’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마태복음에는 이 말씀이 반복되고 있다. “이루려 하심이라.”
p. 41~42
그렇게 당신이 바로 ‘그 메시아’이심을 밝히신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다. 그렇게 당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밝히신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다. 이 당시 세리는 ‘로마의 관원’이 아니었다. 쉽게 표현하면, 그들은 로마 당국과 계약을 맺은 ‘자영업자(?)’였다. 그리고 이들은 로마 당국과 해마다 계약을 갱신(更新)했다고 전해진다. 로마 당국이 해당 지역에 기대하는 ‘세금 총액’을 걷어 납부하는 한 로마는 이들의 업무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들은 해마다 로마 당국과 ‘세금 총액에 대한 계약’을 갱신했다. 그러한 이유로 계약을 유지하기 위해 세리들은 로마 관리들에게 막대한 ‘로비(lobby)’를 했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세리들의 ‘친(親) 로마적 성향’은 강화되었다. 즉 이 당시 로마 관리와 세리 사이는 소위 ‘밀월관계(蜜月關係)’였다.
그러니 마태를 ‘여섯 번째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예수님을 향한 유대 민중(民衆)의 열망(熱望)이 커지던 때였다. 다윗과 같은 ‘군사적 정치적 메시아’로서 로마를 쳐부수실 분이라는 기대가 커지던 때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 민족을 로마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구약 전체가 그 사실을 예언하고 있었다. 다만 ‘혈통적 선입견(血統的 先入見)’에 갇혀 유대인들이 ‘그 메시아’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었을 뿐이다. ‘선민의식(選民意識)’에 갇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해 오해했을 뿐이다.
p. 82~83
마태복음의 한가운데는 ‘떡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이때 등장인물은 ‘예수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고 수로보니게 여인’이다. 이들 중 예수님과 ‘떡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예수님과 말이 통했던 인물’은 누구였는가? 그렇다. 바로 ‘수로보니게 여인’ 단 한 명뿐이었다.
그렇게 ‘수로보니게 여인의 귀신들린 딸’을 고쳐주신 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들 가운데 ‘보지 못하는 자와 말 못하는 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러니 생각해 보라. 마태복음의 ‘떡 이야기’에 등장하는 유대인 가운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과 말씀을 ‘보고 들을 수 있었던 자’가 있었는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렇다면, 마태는 마태복음 한가운데 기록한 ‘떡 이야기’를 통하여 누구를 고발하고 있는 것일까? 누가 ‘보지 못하며 누가 말 못하는 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일까? 누가 예수님께 나아와 고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일까? 궁극적으로 누가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가 필요한 개’라는 이야기일까? 그러니까, 누가 ‘진정한 이방인’이며 누가 ‘진정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라는 이야기일까? 더 설명이 필요할까?
그렇게 대화를 마친 뒤,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화답(和答)하셨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렇다. 진정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은 바로 ‘수로보니게 여인’이었다!
p. 112~113
우선 ‘사울’은 ‘큰 자’가 아니라 ‘희망 혹은 여호와께 구하다’라는 뜻이다. ‘바울’은 ‘작은 자 혹은 작음’을 뜻한다. ‘베냐민 지파’였던 그의 ‘히브리식 본명(本名)’은 ‘사울’이었다. 아마도 그의 이름은 베냐민 지파가 배출한 ‘이스라엘의 초대 왕(初代 王) 사울’에서 따 온 것일 것이다. 이렇듯이 ‘부모 친척 혹은 그들이 속한 지파’의 걸출한 인물에서 아이의 이름을 따 오는 것은 유대인의 풍습이었다.
그리고 ‘바울’은 ‘헬라식 이름’이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예루살렘 성전에서 체포되었을 때, 바울이 천부장의 허락을 받은 후 백성들을 대상으로 했던 연설의 시작 부분이다.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다. 다소는 ‘길리기아 주(州)의 수도’였다. 다소는 ‘중계 무역의 주요 거점 도시’로서 경제적으로 부유한 곳이었다. 그리고 ‘철학 등 모든 학문이 발달한 곳’이었다. 이것은 동서양 문화가 교차하는 지리적 이점(利點)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헬라 문화권에서 태어난 그는 고향에서는 ‘바울이라는 헬라식 이름’으로 불렸을 것이다. 그랬던 그는 어린 시절에 일찍이 예루살렘으로 건너와 가말리엘 문하에서 교육받았다. 그 결과, 예루살렘에서는 ‘히브리식 이름인 사울’을 썼을 것이다.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쉽게 말해,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계’가 어린 시절에 대한민국으로 건너와 학교에 다니면서 ‘미국식 이름’을 쓸 리는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그때는 로마의 식민 지배를 받던 시기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유대인으로서의 ‘자주 의식과 정체성’이 특별히 더 강조되던 시기였다. 그러니 그는 예루살렘에서는 사울로 불렸을 것이다.
p. 179~180
이 부조(扶助)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간단히 설명하면 이와 같다. 길을 가는데, 모르는 사람이 주는 돈을 받을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은 ‘남이 아닌 사이’에만 대가(代價) 없이 돈을 주고받을 수 있다. 즉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 교회가 보낸 돈을 받는다는 것은 이 두 교회가 서로 형제가 되었음을 의미했다. ‘유대인으로 구성된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이 주축이 된 안디옥 교회’를 ‘형제 교회’로 받아들였음을 의미했다.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예언된 기근’이 예루살렘 교회를 덮친 이유였다.
즉 우리는 ‘교회 공동체 가운데 임하는 어려움’을 이 같은 관점으로 볼 필요가 있다. 우리 가운데 어려움이 덮칠 때 우리는 ‘화해의 손을 내밀어 하나 될 형제들’을 찾아보아야 한다. 이 감동적인 일을 마친 뒤 바나바와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던 마가’를 데리고 안디옥 교회로 돌아왔다. 그런데 마가가 마음속에 있는 ‘이방인에 대한 반감’ 때문에 선교팀을 이탈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즉 일부 신학자들의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쉽게 말해, 마가는 부잣집 도령으로서 ‘모든 것이 불편하고 힘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앞에 놓인 길이 두렵기도 하고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그에게 있어서 아버지와 같은 존재인 바나바에게서 바울로 ‘선교팀의 리더십(leadership)이 바뀐 것’ 또한 그의 의욕을 떨어뜨렸을 것이다. 하지만, 풍토병인 말라리아로 사경(死境)을 헤매던 바울 입장에서는 ‘마음속 깊이 새겨지는 실망과 서운함’이었을 것이다.
p. 235~236
저자 | (기본값:제작사 정보 미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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