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보수 기독교인
칼 트루먼 | 지평서원
10,000 9,000원
코끼리 이름짓기 (기독교 세계관 라이브러리 3)
제임스 사이어 |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IVP)
16,000 14,400원
[20주년 확대개정판] 창조 타락 구속 (기독교 세계관 라이브러리 1)
알버트 월터스 |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IVP)
12,000 10,800원
예수와 권세
톰 라이트 | 야다북스
20,000 19,000원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 | 새물결플러스
25,000 22,500원
성경적 비판 이론
크리스토퍼 왓킨 |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IVP)
70,000 63,000원
하나님의 질서와 인간의 법
김명환 | 쿰란출판사
13,000 11,700원
나는 기독 청년 교회는 안 가요 (도지개 기획 3)
서도원 | 동연출판사
15,000 14,250원
기후위기 시대의 희망 영성
김영락, 오방식, 최광선 | 신앙과지성사
15,000 13,500원
분별 복음의 눈으로 정치 읽기
임승민 | 세움북스
16,000 14,400원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김정은 국무 위원장에게
한 작은 그리스도인 박정래 | 크리스천리더
12,000 10,800원
성경으로 본 나의 혼 괜찮을까
김현아 | Between
10,000 9,000원
저출생과의 전쟁 (유럽편)
사)행복한출생든든한미래 | CTS기독교TV
33,000 29,700원
넷플릭스가 삼켜 버린 기독교
홍광수 | 세움북스
16,500 14,850원
지구의 편지
창조세계 돌봄 국제포럼 |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IVP)
18,000 16,200원
머리말
하나님 나라 지평에서
예수님은 마 5:43-48절에서 원수 사랑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에는 명시적으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는 말씀은 없습니다. 레 19:18절이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레 19:18절에 대한 유대인들의 오해와 왜곡을 지적하셨습니다. 모세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하면서 원수에 대해서는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라고만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말씀에서 사랑의 대상을 이웃으로 한정하였습니다. 이웃은 사랑의 대상이지만 원수는 사랑의 대상에서 제외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이 발전하여 이웃은 사랑의 대상이 아닐 뿐 아니라 미움의 대상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원수들과 많은 전쟁을 하였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원수를 물리쳐 주셨습니다. 그들의 원수는 그들의 원수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은 인간적인 생각으로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성경에 비추어 정당하게 성립이 되는 것으로 판단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판단이 후에는 노골적으로 원수를 미워하라는 가르침으로 굳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가르침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유대인들의 생각과 판단에 따른 전통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들었으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너희들이 그렇게 듣고 배웠으나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도 아니고 하나님의 뜻도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원수를 미워하는 가르침의 극단적인 예가 바로 이슬람입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처럼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치고 실천하였습니다. 구약에서 원수에 관하여 명시적으로 가르치신 것은 “원수를 갚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원수를 갚지 말라는 말씀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더구나 아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으로 원수를 갚는 행위가 정당화되었습니다. 원수에게는 아무리 잔인하게 해도 되고 더 나아가서는 최대한 잔인하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슬람은 그러한 가르침을 아예 그들의 경전에 추가하였습니다. 이를테면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알라의 뜻이고 그 원수를 잔인하게 죽이는 것이 알라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도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이지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한 생각은 그 시대뿐만 아니라 기독교에서도 오랫동안 중요하게 생각하고 실천하였던 가르침입니다. 십자군 전쟁이나 마녀사냥이나 종교재판 등이 다 원수를 미워하라는 잘못된 가르침을 따른 것입니다. 그런 그릇된 가르침에 의해서 교회가 원수라고 생각한 대상에게 얼마나 잔인한 고문과 폭력과 살인을 저질렀는지 모릅니다.
유대인들은 이웃을 사랑하되 그 이웃은 율법을 잘 지키는 유대인에게 한정하였고 그 범위를 벗어나는 대상에 대해서는 인정사정없이 잔인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유대인의 그러한 율법 이해와 종교심을 바울의 경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가 회심하기 전까지 그런 가르침을 따라 종교적 열심으로 예수님과 그를 믿는 교회 성도들을 핍박했던 것입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바울처럼 생각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이 말씀을 들은 자들은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으로 믿고 있는데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의 토대가 되는 말씀 자체를 뒤엎어버린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참 좋은 말씀이지만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원수를 미워하라고 믿고 가르치고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황당한 말씀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이 왜곡된 율법과 그릇된 엄격한 전통의 가르침에 짓눌려 지내던 힘 없고 약한 사람들에게는 좋은 말씀이지만,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대부분 유대인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냥 두면 큰일을 낼 사람으로 생각하여 집요하게 비난하고 방해하고 핍박하고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영웅전의 저자 플루타크(Plutarch)는 그의 저서에서 아리스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클레오메네스에게 “선한 왕이 행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고 물었을 때 그는 대답하기를, “친구에게는 선으로, 원수에게는 악으로 돌리는 것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리스토는 말하기를, “우리의 친구에게는 선을 베풀고 우리의 원수를 친구로 삼는 것은 얼마나 더 좋은 일인가, 이것은 원수의 머리 위에 숯불을 올려놓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을 알지 못했던 이들도 조금만 생각을 깊이 한 이들은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옳고 정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바울도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알았다가 회심 후에 그것이 잘못된 것을 깨닫고 롬 12:19절에서 원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가르쳤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뿐만 아니라 바울은 율법의 참뜻을 깨닫고 원수를 적극적으로 사랑할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원수 사랑에 대한 명령을 순종해야 하는 이유와 근거를 마 5:45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원수를 사랑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의 뜻은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임을 증명할 수가 있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는 일이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하는데 그냥 좋은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하거나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할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 7:22-23절에서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그들이 원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이 가르침에 수없이 많은 실패를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기 위해 늘 마귀가 예수님께 제시했던 일들로 증명하려고 합니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아들임을 신비한 기적으로 증명하라고 유혹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유혹을 물리치셨지만, 교회는 늘 그 유혹에 넘어졌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우리가 원수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본을 따르도록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마 5:45절에서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사람들은 사랑을 베풀어야 할 대상을 이웃으로 정해 놓았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이웃에서 제외된 사람은 사랑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성경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은 이원론적인 영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대상이 나의 이웃으로 정해져 있지만 예수님은 사랑의 대상을 하나님 나라 지평에서 찾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나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 나라의 지평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지평이란 하늘과 땅이 맞닿는 넓고 평평한 땅을 뜻하지만, 학문에서는 범위나 한계, 전망이나 가능성의 뜻으로 사용됩니다.
우리 사랑의 지평은 매우 제한적이고 좁습니다. 우리 사랑의 지평은 가정 교회 친구 선행 전도 기도 선교 교육 친교 등과 같은 것으로 한정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지평은 그러한 분야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 지평이 태양이라면 우리의 사랑의 지평은 손전등과 같습니다. 손전등은 아주 작은 부분만, 내가 보기를 원하는 부분만 비춥니다. 그러면 그 나머지는 어두운 부분으로 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햇빛처럼 온 우주를 비춥니다. 아름다운 꽃이나 푸른 산이나 맑은 물만 비추는 것이 아니고 바위와 흙과 온갖 산짐승과 들짐승과 생물과 무생물과 심지어 썩어 냄새나는 시궁창과 시체와 배설물에도 햇빛은 비칩니다. 내 가족이나 내 친구에게뿐 아니라 원수에게와 원수의 가족에게도 원수의 밭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미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미치는 곳이 하나님 나라 지평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미치는 곳을 주님께서는 햇빛이 비취는 곳이라고 하셨습니다. 햇빛은 지구뿐만 아니라 온 우주를 비춥니다. 햇빛이 비치는 모든 곳이 하나님 나라의 지평입니다.
정치와 경제와 교육과 학문과 문화와 예술과 외교와 환경과 그 어떤 분야도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서 제외되는 곳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다양하고 폭넓은 하나님 나라 지평을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 나라 지평이 바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지평임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과 관심을 쏟으시는 곳에 우리도 사랑과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실이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예수님은 우리의 목표가 어딘가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어떤 이념이나 사상이나 인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이 말씀의 가르침을 통해 나는 인간 우상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훌륭한 사람을 존경하되 지나치게 존경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인간 우상은 없습니다. 또한, 철학과 과학과 이념과 사상과 그 어떤 이론도 상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교회도 우상이 되면 안 된다는 사실도 배웠습니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도 우상이 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얼마나 강조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 나라 지평에서는 하나님의 손길을 교회와 전도와 선행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한 포기의 들풀의 생태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는 텃밭을 가꾸면서 늘 하나님과 함께 가꾸는 텃밭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말을 가벼운 농담으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내가 정치와 외교와 경제와 환경과 문화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바라보면 목회와 은퇴와 선교와 휴식과 노동과 놀이와 학문과 문화와 온갖 분야와 범위와 내용이 사실 구별이 없어집니다.
그런 것들이 나를 제한하고 웃고 울게 하지만,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오늘 나는 목회에서 은퇴합니다. 오늘 이후 나의 교우들과의 만남과 교제가 전보다는 약간 소원해지겠지만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도의 교제는 그 어떤 물리적인 조건이나 환경에 의해서 없어질 그런 것이 아닙니다. 조금의 물리적인 변화와 감정적인 아쉬움이 있겠지만 성도의 교제는 날마다 더 깊어지고 넓어지고 진지해져야 합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럴만한 근거와 토대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 지평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 지평을 열어가는 우리의 미션입니다. 한 하나님을 섬기며 그 나라 백성으로 함께 천국 순례길을 가는 교우들이니 하나님의 뜻과 일상을 함께 나누며 주님 앞에 가는 그날까지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사랑하며 하나님 나라 지평을 개척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 지평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 나라 지평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하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하는 일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일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원수를 사랑한다면 최고의 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모든 교우가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기도하고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주님과 동행하며 하나님 나라 지평에 깊이 참여하는 복을 누리게 되기를 바라고 기도합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 5:45).
“그동안 신학덕담으로 써 왔던 글들을 모아 또 한 권의 책으로 엮었습니다. 이미 인터넷이나 나의 페이스 북에 올려진 글들이지만 책으로 출판되면 몇몇 분들이라도 더 읽고 도전과 유익을 받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세상에 내어 놓습니다. 문장이 매끄럽지 못하고 논리가 명료하지 못한 부분들이 많고 내용과 표현에서 중복되는 부분도 적지 않고 여러 책과 글들을 읽으며 얻게 된 정보와 깨달음을 통해 저의 뜻을 밝히려고 나름 노력하였습니다.
글이 학문적이지 않고 개인적인 비평과 신학덕담이라는 글의 성격상 정보의 출처를 일일이 밝히지 않은 것과 저자의 생각과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내용에 대해서도 독자들께서 혜량하시기를 바랍니다. 저의 글들을 사랑해 주시고 또한 비판해 주신 모든 분들과 저를 믿어주신 교우들과 무언의 지지와 격려를 해준 친구들과 모든 지인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 책의 출판을 맡아 수고해 주신 강신억 목사님과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고, 또한 이 글 한편 한편이 나올 때마다 교정을 하며 조언을 해준 사랑하는 아내 “성숙”에게 감사하며 늘 아빠를 자랑스럽게 생각해주는 두 딸 “성아. 성민”과 성실하고 든든한 지원자 두 사위 Ryan과 Paul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또한 언제나 나에게 활력소가 되는 손자 Lukas와 손녀 Lauren도 하나님 나라 지평을 열어가는 일꾼으로 자라가기를 바랍니다. 이 모든 분들이 아니면 나의 존재도 나의 글도 불가능하지만 이 모든 분들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나의 존재와 나의 글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나의 글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나’라는 존재의 하나님을 향한 영적 생명의 형식들입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이 책을 읽게 될 모든 이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 지평이 확장되어 독자들의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작은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대합니다.
_2024년 9월 30일
Long Island Sound 끝자락
Bay Terrace 아파트 6층 조그만 서재에서
지은이 드림
머리말/ 하나님 나라 지평에서 …… 8
지평 1.
인종차별과 평등의 문제
01. 인종차별과 평등의 문제 19
02. 노예제 26
03. 노예 해방과 제4계명 32
04. 히브리 노예들 38
05. 그리스 로마의 노예들 44
06. 자본주의맹아론(資本主義萌芽論)의 허상 50
07. 조선의 노비들 57
08. 미국 남부의 노예들 63
09. 편견과 차별대우 70
10. 고정관념 78
11. 인종차별 오해 84
12. 인종과 성의 우열 그리고 인종차이 90
13. 인종과 문화적 분리는 장벽이 아니다 97
14. 페미니즘의 과유불급(過猶不及) 104
15. 인종차별 문제가 인권 문제를 덮고 있다 110
16. 장애인 116
17. 우생학 122
18. 미국에서의 우생학 폐해 128
19. 유전공학, 포스트 우생학을 경계해야 134
20. 전체주의 140
21. 전체주의를 용이하게 하는 인프라 146
22. 비판적 인종 이론(CRT-Critical Race Theory) 153
23. 비판적 인종 이론의 뿌리와 현상들 159
24. 무신론은 무엇이나 정당화 한다 165
지평 2.
무신론이 지배하는 사회
01. ‘깨어 있는 시민의식’이라는 ‘Wokeism’에서 깨어나야 171
02. Wokeism을 표방하는 이들,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음을 알아야 1 175
03. Wokeism을 표방하는 이들,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음을 알아야 2 181
04. Wokeism, 가치 질서에 대한 분별력을 마비시킨다 186
05. 반복되거나 장기간 비상사태는 전체주의 인프라로 악용될 수 있다 193
06. 미국이 지나치다 199
07. 여성권이 생명권보다 우선할 수 없다 205
08. 바이든의 실정과 우크라이나 사태 211
09. 지도자가 빠지기 쉬운 유혹 218
10. 분별의 어려움 224
11. 글로벌리즘의 한계 231
12. 애국 지식인의 미국 비판의 의미 236
13. 소크라테스의 반증 논리 242
14. 현대 서구사회에 드리운 전체주의 그림자 247
15. 연성(軟性) 전체주의 253
16. 미 전역을 강타한 토네이도 260
17. 모더니즘의 붕괴 현상들 267
18.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 274
19. COVID19 치료제 개발에 대한 정치적 백태클 1 279
20. COVID19 치료제 개발에 대한 정치적 백태클 2 285
21. COVID19 치료제 개발에 대한 정치적 백태클 3 290
22. COVID19 치료제 개발에 대한 정치적 백태클 4 296
23. 마녀사냥 패러디하는 미 CDC의 COVID19 Report 304
24. 제3의 물결, 학교가 위험하다 310
25. 문화 지우기는 기독교 지우기다 316
인종차별과 평등의 문제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지만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평등하게 창조되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각각 크기, 형태, 피부색, 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피부색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지금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의 피부색은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라 태어날 때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능력, 지능, 개성, 감정, 말하는 법, 기호나 식성, 교육, 경험, 직업 등에 있어서 서로가 아주 다릅니다. 또한, 사람들은 시대나 영적 성숙도에 따라서 도덕적, 영적으로도 많이 다릅니다. 모든 사람이 서로 다르지만,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하며 대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동등하다는 사실은 피차 존엄과 가치를 존중하여 서로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와 지위와 역할을 자신의 것처럼 소중하게 여기고 기뻐해야 할 의무를 갖게 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각자에게 부여하신 의무이며 책임입니다. 동등한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을 소홀히 하여 피차의 가치를 과소평가하거나 피차의 은사를 질투하고 피차의 높아짐과 잘 되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려고 불법과 술수와 횡포를 자행하는 것은 명백한 죄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매우 주의해야 할 것은 모든 사람을 똑같은 방식으로 대하거나 취급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탁월한 성악가는 탁월한 성악가로서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학문이 깊은 학자는 학자로서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피아노를 연주하지 못하는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는 위대한 피아니스트로서가 아니라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존경받아야 합니다. 공평하고 정의로운 판사는 그 공평하고 정의로움 때문에 더욱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판사로 부름을 받은 자는 판사로서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특별한 분야에서 힘든 노력을 통해 진보를 이루고 그 진보가 공익에 이바지한다면 그 역시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그가 선한 사람으로 존경을 받아야 하는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모님, 교회 지도자들, 세속 권력자들도 존경해야 합니다.
어떤 분야에서 탁월한 사람을 존경해야 하지만 그 어떤 위대하거나 탁월한 사람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선 존경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모든 사람의 존엄과 가치를 높여야 하지만 각자가 받은 은사와 직분을 자신의 것처럼 기뻐하기 위해서 그들 가운데서 차이를 인식해야 합니다. 만약 모든 이들이 같은 은사를 가졌다면 더 높이고 더 존경해야 함은 불필요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동등함이나 다름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은 동일을 과장하는 경우가 많고 보수주의자들은 다름을 과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은 모든 성적 지향이 도덕적으로 같다고 주장하며 그 사실을 부정하여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은 편견이라고 주장합니다. 보수주의자들은(지금은 많이 변했지만) 그 차이를 과장해서 인간 사상과 문명에 끼친 여성과 소수자들의 기여를 무시하였습니다. 진보주의자들은 학교에서 시험을 최소화해서 한 집단의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보다 우월감을 느끼는 것을 차별이라고 하여 막으려 하고 있습니다. 여성의 참여를 최대화하기 위해 군대, 경찰, 소방대원 같은 특정 직업의 자격 조건이 현저하게 낮아지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모든 사람이 모두 똑같은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집단이나 배경이나 교육적 수준이 달라도 누구나 모든 직종에 똑같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만약에 어떤 사람이 자격에 못 미치면 그 자격 요건을 낮춤으로써 그들이 같은 자격을 얻어야 한다는 식으로 인종차별을 없애려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모든 직업에 자격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두 핵물리학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국가 대표 축구팀의 골키퍼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갱도 작업이나 벌목 일에 적합한 사람은 남성이 여성보다 많습니다. 어떤 NBA 감독이 사실을 말했다가 해고되는 예도 있었지만, 농구 선수 중에 탁월한 선수는 백인보다 흑인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그와 같은 사실을 근거로 백인에게 농구를 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동등을 희생하고 다름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합리적이고 성경적인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동일과 다름의 본질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바울은 모든 인간을 한 종족으로 보았습니다(행 17:26). 아담은 우리 모두의 조상이고 홍수 이후에는 노아가 우리의 조상입니다. 성경은 셈과 함과 야벳의 후손과 나라들에 대하여 언급하였습니다. 노아는 셈에게 축복을 선언했고 야벳은 셈의 장막에 거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야벳은 이방 나라들의 조상인데, 노아가 축복한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된 것이 그 약속의 성취입니다. 노아의 이 축복 예언에서 함은 제외되었는데, 함은 술 취하여 벗은 아버지를 범한 죄로 저주를 받았고 함의 아들 가나안은 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멸하라고 명령한 불레셋 족속의 조상입니다. 나라들 안의 개인들은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지만, 그 나라들이 모든 면에서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라들이 역사 안에서 각각 행해야 하는 다른 역할들을 주셨습니다. 셈이 받은 복은 세상을 구원하는 이스라엘의 특별한 역할을 보여주고 있으며, 야벳이 받은 복은 모든 나라가 이스라엘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 오며 그에게 의존하는 것을 기대하고, 가나안이 받은 저주는 하나님이 아버지의 죄를 자식에게서 찾으신다는 출애굽기 20:5의 진리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바벨탑 사건에서 나라 간의 실제적인 구분을 하기 시작하셨습니다. 홍수 심판 이후 인간들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복종하기보다는 우상적인 구조를 중심으로 하나 된 문명을 추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심으로 그들의 계획을 심판하셨습니다. 언어의 다양성은 나라 간의 주된 차이점 중 하나입니다. 여기에서부터 같음보다 다름이 강조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창세기 12장의 아브라함 이야기는 하나님의 구속의 복이 계속해서 한 나라 이스라엘로 좁혀지며 결국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좁혀지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은 시작부터 아브라함의 복이 결국 세상의 모든 나라를 위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2-3) 이사야는 이스라엘과 적들이 같음을 미리 내다보았습니다.”(사 19:22-25)
율법은 대부분 이스라엘을 다른 문화의 악한 영향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그렇지만 이 율법은 또한 증인의 기능을 하게 하려고 주어진 것입니다(신 4:5-7). 다른 나라들로부터 구별된 이스라엘의 순결함은 그 나라들의 질투를 유발시켜 참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유혹하는 증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이스라엘인은 하나님이 주신 이 구별을 사용하여 도리어 다른 나라들을 경멸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파 운동은 “이방 나라들은 개와 먼지”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 자신은 이방인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분에 관한 설명인 마태복음 12:18-21은 이사야 42:1-3의 약속을 인용하고 있습니다(참고 눅 2:32), 마태복음 8:5-13을 보면 예수님은 로마 백부장에게 대하여 그의 믿음이 이스라엘의 어떤 이들보다 크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5:21-28에서 예수님은 가나안 여인의 비유대인 혈통을 강조하며 유대인의 식탁에서 그녀를 “개”라고 부르는 역설적인 대화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대화 이후에 예수님은 그녀의 요청을 받아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8:18-20의 지상 명령에서 예수님은 교회의 주된 의무를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지상 명령은 구약에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오는 구심력 운동을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나라들에게로 복음을 가지고 가는 원심력 운동으로 바꾸셨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이스라엘 백성을 다른 나라들로부터 구분시키기 위한 구약의 율법 기능을 폐지했습니다. 하지만 초대 기독교인들은 오순절 이후에도 이방인들을 향한 사역을 꺼려서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환상을 주시고 직접 명령하시기 전까지는 이를 망설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순종하며 응답했습니다(행 10:34-35). 성령이 이방인들에게 임하셨음을 듣고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행 10:47). 교회는 또한 이방인 신자들을 환영했습니다(행 11:1-18). 하지만 후에 베드로는 이방인 신자들에 대한 열린 자세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했으며 이로 인해 바울의 책망을 들었습니다(갈 2:11-14).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가지고 가라는 특수한 책임과 함께 바울을 사도로 세우셨습니다(행 9:15). 바울은 그가 가는 곳 어디서나 회당에서 설교하였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그의 복음을 거절했을 때 바울은 이방인들에게로 갔습니다(행 13:46-48; 18:6; 22:21; 26:17-20; 28:28). 그 이후로 하나님은 계시록의 놀라운 찬양을 고대하며 전 세계에 교회들을 세우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계 5:9; 참고 계 7:9)라고 하였습니다. 초대 교회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의 높은 인종적 장벽을 극복해야 했었습니다. 유대기독교인들 중 일부는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으려면 율법 전체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그러한 유대인들 때문에 이방인들은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 먼저 유대인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특히 할례가 어려운 문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 15:1-35에서 예루살렘 공회는 이방인들이 이러한 요구들에서 벗어난다고 선언하게 됩니다. 비록 유대인들에게 공격을 받지 않기 위해서 그들은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행 15:20)해야 했지만 말입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모두 자신들의 편안한 지대를 벗어나 조금씩 양보를 해야 했습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에게 공격을 받지 않기 위한 관심을 기울여야 했으며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율법주의와 배타성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신약은 헬라인과 로마인들 혹은 아테네 사람들과 고린도 사람들 사이의 다른 인종적, 국가적 긴장에 관해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장벽을 무너뜨리셨기에 이보다 덜한 장벽 또한 깨뜨리실 것이라고 사도는 분명히 말했을 것입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이는 이러한 차이들이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구절이 선언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 사이에 교제를 막는 장벽들이 제거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모든 이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우리 사이의 차이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하나 됨에 비하면 사소한 것입니다. 지도자가 섬기는 지도자가 되며, 따르는 이가 섬기며 따르는 이가 될 때, 지도자와 따르는 이들 간의 긴장 역시 해소될 것입니다. 로마서 12:3-13과 고린도전서 12:4-31은 인종이나 국가적 차이에 집중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절들은 우리를 긴장하게 하는 다른 차이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으며 이 차이들을 환영하고 있습니다. 다르다는 것은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온전한 몸을 세우기 위해서 우리 개개인에게 고유한 선물들을 주셨습니다. 발은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 하였다”(고전 12:15)고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눈 또한 손에게 “내가 너를 쓸데없다”(고전 12:21)고 할 수 없습니다. 몸의 모든 부분은 다른 부분들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차이점들을 없애지 않으십니다. 어떤 면에서 그분은 우리 개개인에게 다른 선물을 주심으로서 이 차이점들을 더욱 키우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 차이들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이 차이들 때문에 우리가 서로를 더욱더 사랑하기를 기대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의 은사들에 대한 바울의 생각은 13장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찬양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와 아주 다른 사람들의 존엄과 가치를 인식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해 노력을 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인종적 문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하라고 부르십니다. 다른 이들의 은사나 진보를 탐하는 것은 계명을 범하는 죄입니다. 성경은 다른 사람의 은사나 성취를 탐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 된 우리가 이렇게 할 때 교회 안에서부터 인종차별이 극복되고 그 연장 선상에서 사회와 국가 간의 인종차별 문제가 극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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